ADVERTISEMENT

(150)「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학도 의용병(7)|학생 2등병(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정부가 애국심에 불타는 학도의 용병들을 소홀히 대우해서 좌절감을 갖게 한 것은 실책이었다.
전력을 총동원하는데 있어, 이들 학도의 힘을 십분 발휘케 못했다는 것은 국가적인 큰 손실이었다.
정부로서는 괴뢰의 남침과 동시에 학도병들에 대해 마땅히 임시방편이 아닌 일관성 있는 정책을 마련했어야했다.
수만 학도들이 군문에 쇄도했는데도 이를 수용할 태세나 준비가 미비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정신적인 냉대마저 가했다.
이와 함께 학생들 자신도 현실을 너무 무시하고 어떤 차별대우를 요구한다든가, 또는 학도단체들끼리의 세력다툼 등, 반성할 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3천5백 명의「전국 호국 학도학병실시추진위원회」대원들이 겪은 일들은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점을 밝히는데 있어 한「모델·케이스」로 삼을 수 있다.

<일신교에 3천5백명 모여>
▲유호필씨(당시 단대 재학=전국 호국 학도학병실시추진위원장·예비역소령·현 공화당 부산동구 당위원장·43)『6·25때 부산에 피란 가보니까 심영수씨가「학도 의용대」를 조직하고 활동합디다. 나는 거기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다가 9·28수복이 돼서 서울에 올라왔지요. 서울에서 학도 의용대 중앙본부장인 손도심씨와 의견이 잘 맞지 않아 나는 별도로 행동을 했읍니다.
10월 중순에 일신국민학교를 얻어 각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를 중심으로「전국호국학도 학병실시추진위원회」를 결성했어요.
학도의용대에 있던 학생들도 상당히 이쪽으로 넘어와 처음에는 대원이 3천5백여 명이나 됐어요. 이선근 정훈국장을 찾아 지원을 요청하니까 쾌히 승낙합디다. 육본인사국의 유근창 중령과 정일권 참모총장도 만나 뵙더니, 이때는 격려를 해 주었어요. 급식은 군에서 받고 합숙을 하면서 자체훈련을 했지요.
학도호국단간부로 군사훈련을 받았던 학생들이 교관노릇을 했어요. 우리는 학도로만 된 연대를 편성해달라고 군에 요구하다가 12월말에 후퇴명령이 내려 인천에서 LST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읍니다.
그런데 우리 대원들을 전부 부산진 국민학교에 있는 제2중앙훈련소로 몰아넣어요. 며칠 있으니까 2등병 계급장과 군번이 나오고요. 이렇게 되니까 대원들이 아우성을 치며 나한테 신랄한 공격을 퍼부어요. 약속이 틀린다면서 나를 사기꾼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밤에는 20∼30명씩 탈영을 해요. 훈련소 당국은 위원장이 왜 탈영을 못막느냐고 나에게 마구 기합을 주고요. 나는 이렇게 학생 대원들과 훈련소 기간병 사이에「샌드위치」가 돼서 말할 수 없는 곤경에 빠졌어요. 하루는 나를 보고 연병장에 학생들을 집합시켜놓고 설득하라고 합디다.
분위기가 도저히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성대 학도 호국단 부위원장 김용우군과 박용은군을 불러서「전권위원장」이란 감투를 씌워서 담을 넘어 대구 육본으로 보냈어요.
이들은 육본에 가서 우리를 이렇게 2등병으로 푸대접할게 아니라 계급도 높여주고 대우도 개선해달라고 호소하는 특사격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순진하고 어리석은 짓이었지만요.
대구에 특사를 보냈다는 소식이 전해지니까 또 야단들이예요. 종합학교를 나와서 소위되는 것보다도 학생들끼리 부대를 편성해서 나가자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무리한 요구였어요.
1월20일에 훈련소장, 최창언 대령이 학생들을 집합시키더니 나보고 설득하라는 거예요. 연단에 올라가서 울면서 진정하라고 호소했죠. 이런 일이 있은지 3일 후부터 대원들을 각 특과 학교로 분산 배치합디다. 나는 진해포병학교로 갔죠. 그후 간부후보생으로 임관됐습니다.』
서정환씨(당시 단대 재학=전국 학도 학병실시추진위 조직국장·예비역대위·현 국무총리 정보비서관·45)『10월 초순부터 신문방송 벽보 등을 통해서 대원들을 모집했습니다. 중학 5년 이상의 학생 3천5백여 명이 일신국민학교에 모였조. 각 대학 학도 호국단간부가 27명이나 됐고요.

<정일권 참모 총장 우대약속>
정일권 참모총장을 만나 우리 학생 대원들은 일반 군인과 달리 구별해서 우대해줄 것을 약속 받았죠. 11월초에는 연대를 편성하고 군에서「카빈」을 얻어다 자체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육본에서 우리에게 임시계급을 준다는 말이 있어 모두 기대가 컸지요. 이러다가 12월 초순에 국방부 정훈국과 의견이 엇갈리게 됐어요. 정훈국은 우리를 보고 선무활동을 하라는거고, 우리는 전선에 나가 싸우겠다는거고요. 12월23일에 후퇴명령이 내려 처음에는 기차로 가려다 예정이 변경돼 인천에서 해로로 가게됐습니다. 부두에는 향토방위군 일반 피란민 등 4천여 명이 모여있읍디다.
우리는 육본서 쌀 14가마를 얻어다 이를 4천명의 인솔책임까지 맡아 가지고 LST에 탔죠. 그런데 미군LST는 조금 가다가 2척의 영국화물선에 옮겨 싣데요. 화물선에 갈아타고 보니 위원장인 유호필씨가 안보여요. 인천에서는 분명히 같이 탔는데…. 대원들이 이 소문을 듣고 도망간게 아니냐고 항의소동을 벌였어요. 나는 뒷배에 탔거나 육본에 연락하러 갔을거라고 설득 무마시켰죠. 밥은 화물선「스팀」위에다 철판을 깔고 지어먹었는데 설익어서 설사환자가 속출했어요. 그러나 나중엔 쌀이 떨어져 굶다시피 하면서 5일만인 12월30일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뒷배에 타고 온 유호필씨를 만나 도망이야기를 하며 한바탕 웃었지요.

<각 특과 학교로 배속되어>
제2훈련소에 수용됐는데 서울서의 약속과는 달리 모두 2등병 취급이예요. 그러니 대원들이 아우성이지요. 이때 훈련소의 육사출신 장교들은 우리 처지를 퍽 동정하고 이해해 주기는 했어요. 결국 023이란 군번과 2등병 계급이 나왔어요. 훈련도 다른 신병과 똑같이 시키고요. 51년1월15일부터 우리 대원을 몇 차례 나누어 각 특과학교로 보냅디다. 나는 포병학교에 갔다가 유호필·한갑동·이성수·이형규 제씨와 함께 성적이 우수하다고 대구포병사령부에 배속됐지요. 이때 나는 한갑동군과 함께 육본의 문상명 소령을 만나 울면서 우리처지를 호소했읍니다.
대원들을 재 규합시켜 주든지 장교로 임관시켜 주든지 해 달라고요. 일주일쯤 있으니까 신응균 포병사령관이 우리 6명을 부르더니 희망대로 될거라고 하더군요. 신 사령관 말씀대로 며칠 후 동래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게되어 두달 훈련을 받고 임관이 됐읍니다.』
「전국 호국 학도학병실시추진위원회」대원의 경우 외에도「학생 2등병」의 체험을 두 증인으로부터 더 들어보겠다.
▲양응씨(당시 대전 중학 재학=3사단 포병대 대원·현 서울병무청장·대령·40)『6월29일에 대전사범을 중심으로 대전중·공업학교 등의 학생간부 56명이 모여 참전의 길을 논의하다가 7월14일에 기차로 대구로 내려가 신병교육대인 제25연대에 입대했습니다. 2천명의 학생이 교복 그대로 자체훈련을 했죠. 8월초에 포병단서 인사참모가 와서 지원자를 모집했는데 대전학생들은 모두 지원했죠. 2주일의 훈련이 끝나니까, 모두 2등병의 계급을 주어 전선에 투입하더군요. 나는 이때 간부후보생 시험을 치러놓고 포항 3사단 포병대대로 갔읍니다.
2등병으로 20여일간 싸우다가 합격통지를 받고 육군종합학교로 갔지요. 이때 함께 입대했다가 아직도 군에 있는 동료로서는 박병덕 대령(국방대) 배정신 대령(○○사단 연대장) 고기환 대령(경북병무청)뿐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혈서 지원>
▲최극씨(당시 대전 중학 재학=3사단 복무·예비역소령·현 신민당 영동지구 당위원장·40)『나는 6·25가 날 때 대전 학련위원장으로 있었는데 7월4일 이철승씨가 대전에 내려와 피란 길에 동도하자는 것을 사양하고 전선에 가겠다고 했읍니다.
시내 각 학교 간부들에 연락해서 참전의 길을 찾기로 했죠. 대흥동 우리 집에 박찬문·오지수·김윤식·이현덕군 등이 모여 모두들 손가락을 깨물어 태극기에다「대한민국 만세」라고 혈서를 써넣었어요. 이 혈서가 박힌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이선근 경훈국장을 찾아갔죠. 우리들의 뜻을 전하니까 장하다면서 나에게 인솔증을 떼 주더군요. 일행 56명을 데리고 7월14일에 대구에 도착하여 25연대에 입대했습니다. 2천여 명의 학생들이 훈련을 받는데 하루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찾아오셔서 격려해 주시더군요. 나는 그후 포병단으로 가서 2주일 훈련을 받은 다음 2등병 계급을 받고 포항3사단으로 배속됐읍니다.
포항전투서 당시 17세인 대전중학동창 강희갑군이 전사했어요. 이때 심정은 같이 죽고 싶을 뿐입디다. 9월 중순께 3사단에 배치된 학생 2등병 중 일부는 간부 후보생으로 나갔고, 나머지는 졸병으로 사단과 함께 북진했습니다. 이때 우리들은 군번과 2등병 계급을 받고도 학병「마크」는 계속 달고 다녔어요. 일종의 자부심에서 그랬는데 일반 병사들은 이것을 몹시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원산에 가서는 고참병들의 구박이 심해서 할 수 없이 학병「마크」는 떼어 버렸습니다. 어찌나 서운하고 야속하던지 눈물이 납디다.
원산전투에서 학병동료인 남용우·유상렬군이 중상으로 후송됐고요. 1·4후퇴로 부산에 후퇴했다가 우리학병 2등병들은 종합학교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죠. 전쟁이 곧 끝나 복교하리라던 희망은 사라지고 군대생활이 계속돼 버린거지요. 나하고 양웅군은 6학년 때 출전해서 모교에서 졸업장은 줍디다. 5학년 이하는 못받아 중퇴가 된 셈이고오.』
※정정=본 연재 제147회의 각 학교별 전사자수 일람 중 전북진안중·고교의「1명」은「27명」의 오기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