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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제7화 양식반세기(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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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종과 양식>
20세기 초반에 우리 나라에도 서양요릿집이 생겨났지만 이는 한일합방이후 물밀듯이 밀어닥친 일본문물에 얹혀 들어온 산물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 나라 사람으로 누가 제일먼저 양요리를 맛보았을까? 아마도 민영익·유길준·윤치호 세 사람일거라고 판단되어진다. 고종 20년인 1883년 민영익은 초대주미전권대사로 유길준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미국 땅을 밟게 됐다. 우리 나라에 첫발을 디딘 주한미국공사 「루시어스·H·후트」에 대한 보빙사로 미국에 건너가게 된 것이다.
두 보빙사는 선편으로 상항을 거쳐 40일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돌았는데 「후트」공사가 상해에서 타고 온 기선을 되돌려 타고 갔으니 아마 함상에서부터 양요리를 맛보았거나 「뉴요크」에서 당시 미국21대 「체스터·아더」대통령을 5번가 「호텔」에서 찾아가서 고종의 국서를 봉정할 적에 「디너」를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때 유길준은 민영익의 알선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미국유학생으로 계속 미국에 남게되어 「매사추세츠」주 「샐럼」시에 있는 「피바디」 박물관장 「에드워드·모스」박사집에 식객으로 들어가 영어공부를 파고들었던 기록으로 봐 유길준에겐 양식이 썩 잘받았는지 모른다.
그는 구주를 거쳐 귀국하자 서유견문록이란 기행문을 남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양식을 먹기로는 윤치호가 이들보다 한발 앞섰는지도 모른다. 초대주한미국공사「후트」장군을 처음 고종에게 소개시킨 윤치호는 1882년5월3일 강화에서 우리 나라가 구미와 맺는 첫 조약인 한미수호통상조약에 「후트」 공사의 말상대가 되어 이를 조인하고 그 자리에 차일(천막)을 치고 축하의 「칵테일」을 교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요리를 제대로 먹기 시작한 사람은 고종과 그의 아드님 순종을 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양요리를 자시고 싶어서 든 것이 아니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생억지로 자셨으니 실은 딱한 노릇이었다.
고종 32년 8월20일(음력) 새벽 경복궁에서 민비가 일본인에 의해 상해되고 은퇴했던 대원군이 다시 등장, 고종과 순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궁중한방에 몰아넣고 말았다. 이때 제일 두려운 것이 음식이었다.
먹지 않으면 굶어죽겠고 먹자니 독약을 섞었을까 겁이 나서 차마 수저를 들 수가 없었다. 이때 외국 사신 중 「러시아」 공사 「웨벨」(위패)의 부인이 앞장서서 조석 수라를 손수 만들어 이중 철궤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 궁중으로 배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싫으나 좋으나 양식으로 끼니를 이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그해 12월21일 새벽 정동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 엄상궁이 뒷바라지를 하기까지 석달동안은 오로지 철궤 속에 잠겨져 들어오는 양요리로만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고종은 「러시아」공관에 머무르는 동안 양식맛이 단단히 들고 말았다. 덕수궁에 돌아온 뒤 이젠 정반대로 「러시아」공관에서 양식을 시켜다먹곤 했다. 물론 궁궐엔 양식을 만드는 집기 등 아무런 마련도 돼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양요리의 진미를 들여준 사람은 「손탁」이란 여자였다. 그녀는 「웨벨」공사의 처형으로 따라와 처음엔 양과자를 만들어 민비에게 선사하여 환심을 산 뒤 민비에게 서양요리강습도 해주고 손수 요리도 만들어 바쳤다. 당시 32살의 꽃다운 나이의 「올드·미스」인 「손탁」은 고종의 양식시중으로 신망을 얻어 마침내는 정동의 왕실부속건물을 기증 받아 황실의 양물일체를 취급하는 어용계를 맡아보게 되었다. 오늘날의 「코미사리」가 열린 셈이다.
그 뒤 정동「클럽」은 「손탁·호텔」로 바뀌어 2층엔 외래객의 객사로 쓰고 아래층에선 상류 사교계를, 주름잡던 이완용 이범진 윤치호 서재필 그리고 궁중의 의전관 이학균, 거부 이봉래 등이 드나들며 「조니·워커」를 마시고 양요리를 먹게 되었으니 「손탁·호텔」은 우리 나라 첫 「레스토랑」이며 「손탁」양은 첫「웨이트리스」라 불러 마땅하다 .우리 나라에 「코피」가 보급된 곳도 바로 「손탁·호텔」에서였다. 일반에선 「양탕국」 또는 가배차로 알려진 「코피」를 어찌나 진상했던지 고종은 중독이 되다시피 즐겨 마셨다. 「손탁·호텔」이 이같이 친노파의 집합소가 되어 고종을 싸고돌다가 친일세력에 몰릴 때 「러시아」어 통역 김홍륙은 만수절의 차례를 기회로 「코피」에 아편독을 풀어 진상, 이를 마신 황태자 순종이 숨질뻔 했던 유명한 진독사건도 이때 일이었다.
그 뒤부턴 「코피」가 독아편이란 「루머」가 퍼져 수난을 겪기도 했다. 「손탁」은 한국에서 양식장사를 하여 주머니가 두툼해지자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공산혁명으로 은행에 넣은 재산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채 71살의 노처녀로 1925년 객사했다. 「손탁」이 떠나자 고종은 양식의 공급원이 끊겼다. 상냥한 「호스티스」를 잃은 것이다. 특히 「손탁」이 떠나던 해 경회루에서 베푼 「부페」 형식의 개국축하 「파티」는 황홀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황제는 마침내 특명을 내리어 궁궐에 본격적인 양식도입 계획을 세우게됐다. <계속><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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