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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늘어난 만큼 행복해진다" … 메르켈 독트린 뿌리째 흔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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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요즘 고민에 빠졌다. 좌파 진영과의 연립정부 구성 때문이 아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위기 탓도 아니다. 바로 ‘행복(Happiness)’이란 화두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 3년 동안 행복을 붙들고 씨름했다. 전문가 17명을 선발해 국민의 행복 수준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지를 연구하도록 했다. 첫 결과가 올 6월 공개됐다. “국내총생산(GDP)은 한 나라의 성과를 재는 척도로선 문제가 많다”는 게 핵심이었다. 이른바 ‘메르켈 행복 독트린’이다.

 직후 메르켈은 경제학과 사회학의 정상급 전문가와 경제정책 담당자들을 독일로 초청했다. 자신의 행복 독트린을 놓고 논쟁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선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이 참가했다. 사공 이사장은 “메르켈이 단순한 경제 성과가 아니라 행복을 중심에 놓고 대내외 정책을 추진하려는 의지가 강렬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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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르켈 행복 독트린은 “‘돈=행복’이란 등식이 꼭 성립하는 것만은 아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레이어드 가설’이다. 이는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석좌교수인 리처드 레이어드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레이어드 교수는 ‘행복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엔 이른바 ‘만족점(satiation point)’이 있다는 얘기다.

 그 만족점은 전문가에 따라 제각각이다. 레이어드 교수는 한때 1인당 국민소득 기준 1만5000달러(약 1650만원)를 만족점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몇 년 전 조금 상향 조정해 2만 달러라고 했다.

 레이어드의 주장은 가설 단계를 넘어 어느덧 정설로 자리 잡았다. 메르켈과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 등은 “GDP 대신 행복지수를 바탕으로 경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반론이 제시됐다. “실제 조사해보니 만족점은 존재하지 않더라”는 얘기다. 이는 행복경제학과 메르켈 독트린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저스틴 울퍼스와 베시 스티븐슨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과 교수다. 두 사람은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행복감은 커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람은 지극히 세속적이어서 학자들마저 드러내놓고 말하기 저어했던, 하지만 시장경제의 통념에 너무나 딱 맞는 주장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제기했다. 두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밀려들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힘을 잃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울퍼스 교수와 전화 인터뷰를 서둘게 했다.

 - 근거가 무엇인가.

 “세계 여러 나라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 우리는 150여 개 나라 데이터를 계량경제학 기법을 동원해 엄격하게 조사했다. 조사 대상엔 미국, 노르웨이, 스웨덴, 한국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도 들어 있다.”

 -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한 나라 안에서 소득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들보다 행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삶에 대한 만족감이 소득에 비례해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 국가 간 비교에서도 같았는가.

 “일치했다. 잘사는 나라가 못사는 나라보다 전반적으로 더 행복했다.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 있기는 했다.”

 - 부탄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히말라야 자락에 있는 이 나라 국민의 행복 수준은 상당했다. 8시간 일하고 8시간 여가를 즐기는 게 제도화된 까닭으로 보인다. 다른 의미에선 한국도 예외적인 나라다.”

 - 무슨 말인가.

 “한국 소득 수준이 1인당 2만 달러 정도인데, 행복 수준은 중국만 못했다. 먼저 연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말하고 나중에 한국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 영국 LSE 레이어드 교수도 데이터를 조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레이어드 교수의 유명한 저서인 『행복:새로운 과학에서 얻는 교훈(Happiness:Lessons from A New Science)』에서 영감을 얻어 이번 분석을 시작했다. 그는 약식으로 데이터를 분석했을 뿐이다.”

 - 데이터 분석이 엉성했다는 얘기인가.

 “그런 뜻은 아니다. 나라와 나라를 제대로 비교하지 않았다. 몇몇 나라만을 선별해 살펴봤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나라를 분석했다. 주요한 25개 나라를 좀 더 깊이 들여다봤다. 우리의 데이터 양이 방대하고 분석 기법이 더 엄격했다는 얘기다.”

 울퍼스 교수는 시장 만능주의자는 아니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가 펴내는 경제활동 보고서(Brookings Papers on Economic Activity)의 편집을 데이비드 로머 UC버클리대 교수와 공동으로 담당하고 있다. 울퍼스 교수는 경제학이 소홀히 해온 여가와 시장에서 가족의 역할 등을 주로 분석하고 있다.

 - 만족점이 없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레이어드 교수가 제시한 1만5000달러나 2만 달러 이상의 소득에서도 삶의 만족감이 소득에 비례해서 늘어났다.”

 - ‘돈이 더 많아져야 행복해진다’는 말인가.

 “조금은 말장난으로 들릴 수 있지만, 우리는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인과관계가 아니란 말이다.”

 -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행복의 원인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다만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주관적인 만족감이 커지는 패턴을 확인했다는 얘기다.”

 - 좀 더 쉽게 설명해줬으면 한다.

 “예를 들면 소득이 늘어나면 선택의 기회가 많아진다. 낮은 소득에선 돈 많은 직업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반면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가족과 같이 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 돈이 여러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말인가.

 “비슷한 얘기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행복의 원인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높은 소득이다. 소득이 많아지면 일을 줄여 더 건강해질 수 있고 스트레스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좀 더 건강해지고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진 게 행복의 요인이다. 돈은 그 요인들을 얼마나 갖출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일 뿐이다.”

 레이어드 교수는 최근 보고서와 인터뷰를 통해 “울퍼스 교수의 분석 방법에도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울퍼스 교수가 소득의 의미를 제대로 정하지 않은 채 소득이 늘어나면 행복도 커진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학계의 일상적인 논쟁과 검증 과정이다. 울퍼스 교수는 “우리는 행복경제학의 통념에 도전하고 있다”며 “우리 분석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행복경제의 의미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 그런데 아까 말한 ‘코리안 퍼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

 “한국의 소득은 최근 60여 년 사이에 아주 빠르게 늘어났다. 내가 만난 한국인들은 그 성취를 자랑스러워 했다. 그런데 삶의 만족도는 터키나 중국만도 못하다. 이는 풀기 어려운 숙제(퍼즐) 같아 보인다.”

 - 한국 문제를 따로 살펴보진 않았는가.

 “컬럼비아대 제프리 삭스 교수 등이 세계 행복 보고서를 펴낸 적이 있다. 한국의 낮은 만족도는 여기서도 이슈였다. (코리안 퍼즐은) 좀 더 철저하게 살펴봐야 할 과제다. 다만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노동 시간이 아주 긴 편이다. 노동 강도도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각종 경쟁도 치열해 자살 사례가 매우 많다. 이 모든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 울퍼스 교수가 한국 정책담당자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은 여전히 소득을 높일 여지가 많은 나라다. 계속 소득을 끌어올리는 정책을 쓸 것이다. 소득 증가 정책을 현 단계에서 멈추면 절대적인 행복 수준을 끌어올리기 어려워서다.”

 - 소득 정책과 함께 쓸 전략은 무엇인가.

 “노동 시간을 줄이고 강도를 낮추는 전략이 필요하다. 늘어난 소득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 벌어 쥐고만 있는 구두쇠가 행복해지기는 어려운 법이다.”

 강남규 기자

◆저스틴 울퍼스=호주 출신 경제학자 겸 공공정책 전문가다. 시드니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블룸버그통신에 정기적으로 경제 칼럼을 쓰고 있다. 올 상반기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국가부채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국가부채가 많으면 경제성장률이 낮아진다’는 주장에 대해 ‘빌린 돈을 생산적인 분야에 쓰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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