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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검찰총장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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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그제 퇴임했다. 25년의 공직생활 전부를 집어삼킬 수 있는 ‘혼외(婚外)아들’ 의혹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의혹은 이제 막장드라마 수준이다. 혼외아들의 어머니로 지목된 임모씨 집 가사도우미에 이어 임씨 가족까지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 전개에 검찰은 그야말로 ‘멘붕(멘탈 붕괴)’이다. 허탈감과 씁쓸함의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다. 한 검사는 “지금도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전직 법무부 장관은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지경”이라고 했다.

 초점은 다음 총장이 누구냐로 옮겨가고 있다. “조직 안정을 위해 외부 인사를 영입할 것”이란 관측과 “인사청문회를 고려하면 역시 내부 인사”란 시각이 엇갈린다. 어느 쪽이든 ‘단언컨대 가장 완벽한’ 인물이어야 한다. 정치적 음모론과 사생활 의혹이 뒤엉킨 채동욱 사태는 ‘영혼탈곡기’ 청문회를 예고하고 있다. 검찰 독립을 지킬 강단과 역량은 물론이고 모든 사생활을 탈탈 털어낼 것이다. 후보 물망에 오른 고검장 출신은 손사래부터 친다.

 “저야 흘러간 사람이죠. (변호사) 홍보 효과가 있으니까 나쁠 건 없지만…지금은 초임검사 때부터 총장 돼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살아야 하는 시대 아닙니까.”

 역대 총장들도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1988년 임기제 도입 이후 임명된 18명 중 6명만이 임기를 마쳤다. 가히 검찰총장 잔혹사다. 이명박정부 이후로는 임채진·김준규·한상대 총장이 줄줄이 중도 퇴진했다. 임 총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김 총장은 검·경 수사권 조정이 발목을 잡았다. 한 총장은 돈 검사·성추문 검사 파문 속에 대검 중수부 폐지를 놓고 내부 갈등을 빚다 낙마했다. 그들의 퇴임사엔 회한과 고언이 교차했다.

 “더 절제되고 더 세련된 모습으로 검찰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적 지탄과 비판에 설 땅을 잃어갈 것입니다.”(임채진)

 “화려하고 의기양양하게 비뚤어진 길을 가기보다는 질퍽거리더라도, 절뚝거리면서도 바른길을 걸어가야 합니다.”(김준규)

 “결국 저는 이 전쟁에서 졌습니다. 우리의 오만을 넘지 못하고 여러분의 이해와 도움을 얻지 못했습니다.”(한상대)

 아무리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늘 목을 내놓고 살아야 한다. 정치권력과의 긴장과 거래, 여론의 격랑 속에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야 한다. 검찰 권한이 강하고 경직되다 보니 작은 충격에도 부러지곤 한다. 그때마다 시퍼런 작두 위에 오른 이는 총장이었다. 이국운 한동대 교수는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으로 이어진 고려 무인 정권의 권력 승계 법칙”을 떠올린다.

 “ 검찰은 무리한 수사나 정치적 편향으로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기존 수뇌부를 잘라내고 새 수뇌부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검찰 통치를 유지해 왔다…이 메커니즘이 활용될수록 검찰은 법에 대한 근본적인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다.”(『법률가의 탄생』)

 채동욱 사태는 과거보다 더 강도 높은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검찰 조직에 확산시키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사태의 본질인지 모른다. 그 결과가 권력에 대한 추종일 수도 있지만 정답은 아니다. 검사들은 채 전 총장 의혹을 넘어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검사 선서)의 길을 가야 한다.

 허무주의는 힘이 세다. 정치적 허무주의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갉아먹듯 ‘사법 허무주의’는 검사들의 정의감을 녹슬게 한다. ‘나 혼자 애써봤자….’ ‘좋은 게 좋은 거지.’ 안온한 처세술은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개혁만이 검찰을 살린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요직을 향한 각개약진을 부추긴다.

 검사들은 과연 바닥 모를 허무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만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 오늘 나는 이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