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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앤드·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열흘넘어 소식이 없는 상훈군의 경우는 보통 유괴사건이 아니다. 히트·앤드·런도 아니다. 누가 치어놓고는 싣고 달아난 것이다. 상훈군의 생사가 더욱 염려되는것도 이 때문이다.
돈을 목적으로한 어린이 유과사건은 유명한 린드버그사건을 위시해서 서양에서도 결코 드물지 않다.
히트·앤드·런은 서양에서도 흔히 있다. 그러나 치고는 싣고 달아나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사건인것 같다.
차사고란 순간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노련한 운전사, 아무리 나무랄데 없는 인격자라도 사고를 완전히 모면할 수 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사고를 저질렀거나 또는 사고가 일어난 직후의 반응에 있다. 사고를 맞는 순간에는 누구나 일시적으로 이른바 제로의 상태에 빠져든다.
제로의 상태에서는 순간적으로나마 겁에 질려, 이성이 마비된다. 그 다음 순간에는 자기목숨만을 아끼려는 가장 원시적인 본능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이때에는 윤리·상식·체면같은 것을 완전히 잊게 된다.
그리고 이런때에 비로소 평소의 그를 규제하고 있던 사회의 규범이, 또는 그가 걸치고 있던 인격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치었을 때와 같은 극한 상황에 놓여 있을때, 사람은 자기와 자기가 살고있는 사회의 숨김없는 얼굴을 보여주게 마련이다.
서양에서는 사람을 치어놓고 다시 자기차에 싣고 달아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극한 상황속에서는 서양인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자기를 잃게되기 쉽다는 얘기도 된다. 피를 그만큼 더 무서워한다는 얘기도 된다.
역상한 어린이를 싣고 달아난다는 것은 그만큼 냉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거기에는 증거를 인멸시키려는 속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번 상훈군의 경우 사고를 낸 운전사가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는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만이 살려는 이기심만이 여기 반영되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뺑소니만 치면 아무 탈없겠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시경의 통계에 의하면 작년의 도주차량사고 1천7백여건중에서 범인이 검거된 것은 6백건도 못된다.
지금도 상훈군을 친 운전사는 서울시내에서 차를 몰고 있을지도 모른다. 끔찍한 얘기다. 그가 과연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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