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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STX조선해양 정상화 첫 출항부터 '암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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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STX그룹이 2008년 중국 다롄(大連)의 창싱다오(長興島)에 건설한 다롄조선소 전경. 조만간 매각할 예정이었으나 박동혁 STX조선해양 대표이사 내정자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매각 작업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중앙포토]

산업은행의 STX조선해양 정상화 작업이 시작부터 큰 암초를 만났다. 강덕수(63) STX그룹 회장을 내치고 대신 ‘선장’으로 내정한 박동혁(56) STX조선 대표이사 내정자가 선임을 하루 앞둔 26일 돌연 사퇴한 것이다. 가뜩이나 그룹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산은과 그룹 간 갈등이 적지 않았던 터라 돌발 변수가 순조로운 정상화에도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 내정자는 27일 열리는 주주총회 및 이사회에서 현 대표이사인 강 회장을 대신해 신임 대표이사(등기이사)로 선임될 예정이었다. 산은에 따르면 박 내정자는 25일 오후 산은을 찾아와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산은 고위 관계자는 “본인이 말하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뜻밖의 결정이었다”며 “대화 내내 만류했지만 본인의 사퇴 의사가 워낙 강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박 내정자가 STX 구조조정 주도에 부담을 느껴 사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박 내정자는 이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STX조선 대표 자리는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며 “어려운 회사를 살리고 한국 조선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각오로 대표 자리를 받아들였지만 점점 내가 있어야 할 위치가 아닌 것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STX 관계자는 “부지런하고 의욕적으로 업무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업무에 부담을 느낀 것 같진 않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동혁(左), 류정형(右)

 경위를 떠나 박 내정자가 갑자기 사퇴하면서 산은은 상당히 체면을 구기게 됐다. 산은은 “한시적으로라도 강 회장을 유임시켜 달라”는 STX조선 측 요청을 물리치고 박 내정자 임명을 강행했었다. 박 내정자가 정상화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주장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박 내정자는 현 직장인 대우조선해양에서 군함 등 특수선 분야에서 주로 일해 왔다. STX조선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 부문인 해양플랜트나 대형상선 쪽에는 별다른 경험이 없다. 대우조선 부사장이 된 지도 채 1년이 되지 않아 리더십이나 경영능력이 입증되지도 않았다. 한 채권단 관계자는 “채권단 사이에서도 그가 강한 리더십과 영업력을 필요로 하는 ‘STX호’ 선장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산은이 관계가 껄끄러운 강 회장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성급하게 박 대표를 내정했다가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진단했다.

 실제 산은은 STX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강 회장 및 그룹 측과 수시로 충돌했다. STX그룹에서는 산은이 계열사들의 자율협약 결정을 늦춰 상황을 악화시켰고, STX팬오션 인수를 공언하다가 갑자기 법정관리를 신청해 자금 확보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비판했다. 팬오션 처리는 강 회장과 산은 간 관계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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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정상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 여부다. 일단 산은은 이날 박 내정자를 대신해 류정형(56) STX조선 부사장을 새 대표이사 후보로 내정했다. 당초 STX조선 사장 내정자였던 류 부사장은 27일 주총과 이사회를 통해 새 대표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류 부사장은 박 내정자와 달리 지난해 3월부터 조선소장을 지낸 현장전문가다. STX그룹에 7년간 재직한 만큼 외부인인 박 내정자보다 내부 사정에도 밝다. 이 때문에 “회사 정상화에 있어서는 박 내정자보다 나을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업계 일각에서는 류 부사장이 강 회장 체제에서 핵심 보직을 맡았던 인사인 만큼 앞으로 강 회장이 경영에 간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반면 류 부사장 역시 산은 관리하에 있는 대우조선 출신이라 산은의 영향력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류 부사장은 1984년 대우조선에 입사해 생산부서장과 인사부장 등을 역임한 뒤 2006년 STX그룹에 합류했다. 익명을 요구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류 부사장은 대우조선에서 잔뼈가 굵었을 뿐 아니라 박 내정자와는 굉장히 친한 사이”라며 “류 부사장이 대표이사가 되더라도 정상화 작업은 여전히 산은이 주도한다고 봐야 하며 강 회장의 경영 관여 여지도 크지 않다”고 말했다.

박진석·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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