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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한 사전, 눌러 쓴 원고 … 창작의 온기 고스란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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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울 한남동 최인호 작가의 집필실 책상 한가운데에 소화(小花) 데레사 성녀의 사진이 놓여있다. 24세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숨진 데레사 성녀는 투병 중에도 이웃과 세상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최인호는 데레사 수녀에게서 암과 싸우는 힘을 얻었다. [김경빈 기자]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 (『최인호의 인생』)

 암투병 5년 끝에 25일 세상을 떠난 최인호(1945~2013)는 죽는 순간까지 작가이고자 했다. 병들어가는 육신은 창작에 대한 열정을 지폈을 뿐이다.

 26일, 고인이 2002년부터 타계 직전까지 집필했던 서울 한남동의 출판사 여백미디어를 찾았다. 10여명의 직원이 책을 만드는 이 곳에 작가의 방이 있었다. 암 투병 전후로 썼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의 인생』 등이 이 방에서 태어났다. 책상 위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빈 원고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작가는 컴퓨터를 쓰지 않았다. 수많은 이야기는 이 원고지와 만년필에서 시작됐다.

 그는 악필로 유명했는데, 아무도 읽지 못해 편집자에게 직접 쓴 글을 읽어줬다고 한다. 사실 그가 악필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작가는 구상을 오래 한 뒤, 한 번에 집필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야기를 토해낼 때 손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여백미디어 서경현 대표는 “머릿속에 컴퓨터가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 누구도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지난 추석, 병원 입원 직전까지 이 사무실로 출근했다. 오전 9시쯤 도착해 작품 구상이나 집필을 하고 나서 오후 6시쯤 퇴근했다. 젊은 작가들의 신작 소설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책꽂이엔 편혜영 작가가 지난 8월 펴낸 소설집 『밤이 지나간다』가 놓여 있었다. 한 켠에 가지런히 꽂힌 국어사전, 영한사전, 고사성어 백과사전에선 모국어와 분투한 고인의 일생이 전해졌다. 그는 추석 전만해도 “걱정하지 마라. 몸이 나으면 열심히 쓸 테니까”라며 직원들을 다독였다고 한다.

최인호씨의 손주가 연필로 그린 고인의 초상화. (사진 위) 아래는 선배작가 박완서씨가 생전에 고인에게 책을 보내며 동봉했던 편지.

 병마와 싸울 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건 신앙이었다. 손때로 누렇게 변색된 성서는 육중한 무게로 책상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고인은 프랑스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1873~97) 수녀의 사진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글 좀 쓰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 때문에 책상엔 눈물 자욱이 자주 찍혔다. 죽기 직전까지도 예수의 생애를 소설로 쓰고 싶어했다.

 가족·친지에 대한 애끓는 애정도 전해졌다. 손주가 그린 초상화, 어린 시절 형제들과 찍은 사진, 아내와 즐거웠던 한 때를 담은 흑백사진은 늘 그의 곁을 지켰다. 벽 한 켠엔 박완서(1931~2011) 작가가 생전에 고인에게 보냈던 편지가 붙어있었다.

 박 작가는 “나도 기도를 보태겠습니다. 제 기도는 나보다 먼저 최인호를 데려가면 가만 안 있겠다는 하느님을 향한 으름장입니다. 나는 백 살까지 살 작정이니까 앞으로 이십 년 이상은 내가 보장할게요”라며 후배 작가를 위로했다.

 고인은 사무실에서 전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판사 직원들의 금기어는 “몸은 괜찮으시냐”였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안부를 물으면 작가가 되려 호통을 쳤기 때문이다. 고인은 방사선 치료로 목이 부었지만 죽 대신 밥을 먹으려고 할 정도로 생의 의지를 불태웠다.

 서 대표는 “차라리 환자처럼 사셨으면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환자 행세를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고인은 글 못쓰는 배고픔이 가장 두려웠다. 죽음과 가까워질 수록 생의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문학이었다.

글=김효은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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