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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을 한민족사 정점에 놓고, 중국과 분리된 정통史 첫 서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천은사.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저술할 당시 살던 강원도 두타산 기슭의 집터에 지어진 절이다. 1948년 화재로 전소됐다가 72년부터 재건됐다. 삼척시 청라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이 역사문화탐방을 하고 있다. 삼척=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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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바람이 차다. 허름한 용안당(容安堂)의 문을 여니 산골 위 밤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 난세의 기운은 촛불에도 어리는가. 창호지에 비치는 어두운 빛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때는 바야흐로 13세기 말. 오늘날 강원도 삼척시 두타산 자락에 얹힌 구동(龜洞). 지금도 삼척 시내 외곽의 인적 드문 길로 차를 20여 분쯤 달려 들어가는 곳이다. 그곳의 작은 시내 용계(龍溪) 기슭에 지은 초옥에서 60대 노(老)선비 ‘동안(動安) 이승휴’의 한숨이 깊고 길다.

파직된 지 반 십 년. 충렬왕의 조정은 어지럽다. 6차에 걸친 몽골의 침략은 20여 년 전 끝났지만 말발굽은 나라와 백성을 짓밟았다. 그때 전란을 몸소 겪지 않았는가.

28세(1252년) 과거 급제 뒤 혼자 되신 어머니가 있는 두타산을 찾았다가 발이 묶였다. 계속된 몽골의 5, 6차 침입으로 삼척의 바닷가 요진산성에 들어가 주민과 함께 버텼다. 그때 몽골의 지독한 수탈을 많이도 봤다. 난이 끝난 뒤 노모와 구동으로 들어가 초가를 짓고 12년간 노비 몇 명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쿠빌라이의 원(元)제국을 어쩔 것인가. 몽골은 너무 세고 간섭은 극성스럽다. 1273년·74년 두 차례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던 경험은 새삼스럽다. 제국은 거대했다. 대도(大都ㆍ현재 베이징)의 여강(濾江) 석교에 뿌린 감탄의 시(詩), 호천사(昊天寺) 9층 목탑의 3층에 올라 ‘사람과 말이 개미 같았다’라고 스스로 쓴 문장들….

날이 밝았다. 가까운 삼화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서서히 걸으며 마음을 고른다. 고려왕조의 현실과 조정을 걱정하고, 역사 정립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기를 몇 해. 그는 이윽고 붓을 든다.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과 확연히 구분된다.
큰 파도 출렁출렁 삼면을 둘러싸고
북녘에는 대륙이 실같이 이어졌다.
가운데 사방 천 리 여기가 조선이다.”

1 『제왕운기』 하권 「동국군왕개국연대」. 단군을 정점으로 하는 한민족 역사가 최초로 정리된 책이다. 2 이승휴의 거처였던 용안당. 이곳에서 『제왕운기』가 탄생했다. 1948년 전소됐다 재건됐다. 3 이승휴가 산책하던 천은사~삼화사 길. 지금은 시멘트 포장이 돼 있다. 4 삼척 죽서루에는 이승휴가 지은 시가 남아 있다(가운데). 시의 내용은 풍광을 노래하고 임금을 걱정하는 것이다.

『제왕운기』는 이렇게 1287년 탄생했다. 책은 상하 두 권으로 구성돼 있다. 상권은 중국 역사를, 하권은 우리 역사를 기록한다. 하권은 다시 「동국군왕개국연대」와 「본조군왕세계연대」로 나눠진다.

개천절·단군과 관련해 중요한 부분은 단군~고려 이전 역사를 다루는 「동국군왕개국연대」다. 「동국…」은 서문과 지리기(地理紀),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기자(其子)의 후조선, 위만의 찬탈, 삼한(三韓)을 계승한 신라·고구려·백제, 후고구려·후백제와 발해까지 정리했다.

「동국…」이 특별한 것은 ‘한민족이 중국과 다른 요동의 별천지에서 독자적으로 살아왔고 우리 역사의 시작은 단군 조선’이라고 하며 ‘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옥저·동북부여, 예·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 인식은 당시로선 파격이며, 현존 우리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정통사관이다.

그 이전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는 우리 역사의 상한을 삼국시대에서 긋는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1280년대)가 단군을 언급하고 상한도 고조선까지 끌어올리기는 한다. 「고조선조」엔 ‘환인·환웅·곰·호랑이’가 등장하는 신화가 나온다. 그러나 이는 일연이 전국을 돌며 자료를 수집해 편찬한 것일 뿐 ‘사관(史觀)’은 없다. 그런데 『제왕운기』는 단군 신화를 역사화해 단군 조선이 중국과 같은 무진년(BC 2333년)에 시작된 것으로 서술했고, 이후 만주·한반도에 출현한 나라를 단군과 체계적으로 연결시켜 ‘후예’로 설명했다. 오늘날 익숙한 한민족 역사체계의 골간은 그가 확립한 것이다.

강원대 차장섭(사학) 교수는 “『삼국유사』에서 단군은 체계적이지 않은데 이승휴는 단군 이래 모든 나라를 그의 후손으로 계보화하는 정통론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저술 ‘고려 중기의 민족서사시 『동명왕편』과 『제왕운기』 연구(1994)’에서 “『제왕운기』에선 평양의 일개 지방신으로 취급되던 선인왕검이 민족시조인 단군으로 승격돼 뚜렷이 나타난다”고 평가했다. 이어 「본조…」는 고려의 시작에서 당대인 충렬왕까지를 다룬다.

이승휴는 왜 이 글을 썼을까. 많은 학자는 ‘팍스-몽골’하에 고려의 조정과 민족의 생존을 어떻게 이어가느냐는 고민 때문이라고 본다. 강원대 윤은숙 교수는 “이승휴가 살았던 시기는 격변의 시기다. 안으론 무신정권이 끝나고 국왕 중심의 지배질서가 회복되지만 밖으론 대원제국이 팽창하며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평가한다. 국민대 박종기(고려사) 교수는 “원을 인정하며 고려의 정통성을 지킨다는 뜻을 편 것”이라며 “단군은 고려인의 문명 수준이 중국만큼 상당하다는 ‘소중화(小中華)의 증거로 제시된 것”이라고 말했다.

차 교수는 “원이 워낙 강해 고려가 사라질 수도 있으며 우리의 뿌리, 역사가 정립돼야 버틸 수 있다고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휴의 현존 저술인 『제왕운기』 『동안거사집』 『빈왕록(賓王錄)』을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한 중앙대 진성규(고려사) 교수는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민중의 고통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웠는데 그런 시련 앞에서 한 지식인으로서의 뚜렷한 역사인식이 『제왕운기』 저술의 심리적 원천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휴가 자신의 저술 『빈왕록』에 생생하게 그린 대로 막강한 원의 파워 아래 생존하려면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빈왕록』에선 대도에 있는 중도성(中都城) 장조전(長朝殿)에서 본 광경을 자세히 묘사하며 그가 받은 충격을 적고 있다.

“…웅장한 규모와 극치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낙성식을 하는데 깃발, 일산 같은 것들이 창공에 펄럭여 해를 뒤덮고 눈을 현란케 하였다. 후학사의 말이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이번엔 겨우 7000명이오. …”

마르코 폴로도 훗날 1299년 출판된 『동방견문록』에서 장조전에 압도당한 느낌을 묘사했다. “…접견실의 방과 벽은 모두 금과 은으로 색칠해졌다.… 어찌나 크고 넓은지 60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방들이 있는지 놀랄 정도다. 그곳에는 군주의 물건들, 즉 보물과 금은, 귀금속, 진주ㆍ금은 집기들이 있다. …”

실제의 장조전은 대명전(大明殿)의 별칭으로 길이가 200척, 깊이 12척, 높이 90척인 대형 건물이다. 오늘날 1척은 약 30㎝로 당시 단위는 지금과 달랐다. 이런 모습은 이승휴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윤 교수는 “당시까지 고려의 몽골 인식은 대표적 문인 이규보가 쓴 것처럼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이 금수보다 심하다’는 데 머물렀는데 이승휴가 본 것은 그게 아니라 거대하고 찬란한 문명체였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승휴가 받은 충격은 종종 조선시대의 연암 박지원과 비교되기도 한다.

연암은 1780년 자신이 청에 축하사절로 가던 행적을 기록한 『열하일기』에서 문화적 충격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는 국경인 책문에서 이렇게 썼다.

“…민가들의 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다. 길거리도 쭉 곧아서 길 옆이 먹줄을 친 듯하다. …변두리 책문의 마을이 이렇게 번듯하니 앞으로 볼 것들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발길을 돌려 한양으로 돌아가 버릴까….”

중국 변경에서 그렇게 주눅이 들었으니 그보다 500여 년 전쯤 원의 중심으로 간 이승휴는 화려한 문물과 강력한 힘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심지어 ‘여름철 중국 대륙의 강을 건너는 두려움’도 두 사람은 비슷하다.

이승휴는 『빈왕록』에서 이렇게 쓴다.

“…다시 묻노니 요하를 어떻게 건널까.
하늘도 삼킬 듯 성난 물결 넓고 넓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홀연히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아 붉은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서 끝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승휴는 어떤 근거로 「동국…」에서 단군을 등장시켰을까. 책은 ‘국사(國史)에 의거하여 각 본기(本紀)와 수이전((殊異傳)에 실려 있는 것을 널리 채집하고’ ‘요순 이래의 경전과 자사(子史)를 참고하되’라고 전거를 밝혔다. 구체적 의미를 중앙대 진 교수에게 물었다.

-어떤 의미인가.
“본기(本紀)는 『구삼국사기(舊三國史記)(실전)』나 현존 『삼국사기본기』일 수 있다. 또 『고기(古記)』로 단군신화가 수록된 책을 의미할 수 있는데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수이전』은 통일신라 말 박인량이 지은 책으로 전하지 않는다. 자·사는 현존하는 중국의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와 25사다.”

-그게 단군의 역사적 근거가 될 수 있나.
“이승휴의 생존 당시에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근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을 고증해야 하는데 아직 국내에서 연구가 돼 있지 않다. 그런데 이승휴는 철저히 근거를 따져 글을 쓰는 유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를 한역한 경험으로 보면 함부로 글을 쓴 사람이 아니다. 이승휴는 당시 개경을 울리는 문장가로 소문이 났다.”

-『제왕운기』에 나오는 요동의 별천지가 요즘 중국에서 발굴되는 요하문화일 가능성이라고 보나.
“일리 있는 주장이다. 요즈음 요하문화가 황하문명보다 앞서 발달했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수세에 몰린 중국이 이 요하문명도 중국사 안에 포함하고자 노력하는 것 같다.”

『제왕운기』의 또 다른 평가 요소는 발해사를 최초로 우리 역사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전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개국하고는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네
우리 태조 8년 을유년에 이르러
온 나라가 서로 이끌고 왕경에 내조하였는데…”

이우성 교수는 “신라 때도 발해에 대한 증오가 식지 않았는데 고려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라인이 당의 과거에 응시할 때 발해인이 같은 비율로 합격한 것을 수치로 여겼을 정도였다.(최치원의 「新羅王 與唐江西高大夫湘 狀」)

그러나 아쉽게도 『제왕운기』 이후 발해사는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500년쯤 뒤인 1784년 조선시대 유득공의 『발해고』에서 부활한다. 그는 “고려가 발해 유민을 최대한 받아들이면서도 그 역사를 편찬해준 일이 없고 …발해는 무시돼 왔다. 그런 까닭에 발해 옛 땅의 반환을 요구할 근거가 없어지고…”라고 개탄했다.

발해뿐 아니다. 사실 선생과 『제왕운기』를 평가하는 국민적 자세도 대단치 않다. 우선 그의 저술 『제왕운기』 『내전록』 『동안거사집』 『빈왕록』 4권 가운데 실전된 『내전록』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2009년 처음 한글로 번역됐다. 이것들을 번역한 진성규 교수는 “『제왕운기』는 1990년대 청구대 박득표 교수가 번역했다는데 책으로 전해지진 않아 사실상 첫 한역인 셈”이라며 “국내 한문 수준이 약해 한역서가 나오지 않으면 연구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연구도 축적되지 못하고, 따라서 기념 의식도 약하다. 영정도 없다.

삼척시가 ‘삼척의 역사적 인물 두 명’ 중 하나인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는 수억원을 들여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공원을 짓고, 영정을 제작하는 것에 비하면 또 다른 ‘삼척의 인물’ 이승휴는 초라하다.

책의 운명도 그 길을 따라온 것인지 모른다. 『제왕운기』는 지어진 즉시 충렬왕에게 바쳐졌지만 방치되다 1296년 간행됐고 1360년 중간됐으며 이후 조선에 들어와 1417년 태종 17년 경주에서 삼간됐을 뿐이다. 이때 경주의 유학교수관 이지(李?)는 “…베껴내는 이가 끊어졌다…탄식하여 보후할 뜻을 가졌다…”고 밝힌다. 그 판본이 지금 전해진다. 인쇄된 책은 보물로 지정돼 곽영대 소장본(418호), 동국대 박물관 소장본(895호), 김종규 소장본(1091호) 셋이 있다.

안성규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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