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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와 판소리꾼 누가 셀까 … 힙합과 국악의 '이종격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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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제1회 ‘레드불 랩판소리’ 16강전에서 조다정(오른쪽)씨가 래퍼 배준희씨를 소리로 공격하고 있다. 조씨는 한양대에서 음악극과 노래연기를 전공하고 있다. ‘귀요미’ 송까지 부르며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낸 그는 8강전에선 “저는 원래 판소리 전공이 아니라 소리를 못해요”라며 소리 대신 랩을 부르곤 탈락했다. [사진 레드불]

음악 분야에는 배틀이 많기도 많다. 힙합의 랩 배틀, 일렉트로닉 DJ 배틀, 밴드도 배틀이요, 데뷔 준비 중인 연습생들끼리도 실력 대결을 벌인다. 어떤 대결이든 같은 종목 선수들끼리 대항하는 건 기본이다.

 그런데 이런 원칙에서 벗어난 이색 배틀이 열렸다. 13일 밤 서울 서교동 홍대 브이홀에서 열린 ‘레드불 랩판소리’ 대회에선 대학생 소리꾼과 래퍼가 1대1 방식으로 대결을 벌였다. 배틀 자체가 성립될 수 있을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예측 불가능한 현장에 다녀왔다.

 국악인을 아내로 둔 래퍼 김진표씨가 사회를 맡아 16강전부터 진행했다. 래퍼 8명, 기권자 한명을 제외한 소리꾼 7명이 무대에 올랐다. 모두 남자뿐인 래퍼와 달리 소리꾼은 남자 셋, 여자가 넷이었다.

 행사 진행 방식도 퓨전이었다. 관람객이 입장할 때 받은 콩주머니를 던져 박을 터뜨리자 시제(詩題)가 내려왔다. 16강의 시제는 ‘꿈, 음악, 날개’.

출연자들은 힙합 반주에 맞춰 각각 1분씩, 반대로 국악 반주에 맞춰 각각 1분씩 즉흥적으로 시제에 맞는 소리와 랩을 해야 했다.

우승을 차지한 소리꾼 이승민씨.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음악과 판소리를 전공하고 있다.

 푸른 도포에 갓을 쓴 소리꾼 이정원씨가 첫 순서였다.

힙합 음악에 소리가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은 첫판에 대번 풀렸다. “자, 음악이란 무엇인고…”로 말문을 연 그는 힙합 리듬에 어색하지 않게 소리를 얹어 정확히 1분간 공연했다. 래퍼 황상연씨는 힙합 반주에선 능숙했지만 국악 반주로 바뀌자 리듬을 타지 못해 헤매다 결국 “아임 다운(I’m down·내가 졌다)”이란 말로 배틀을 마무리했다.

 관객의 문자 투표 결과 소리꾼의 승리가 확정됐다. 그 다음으로 대결을 벌인 래퍼 한종호씨는 라임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랩으로 승리를 차지했다. 상대로 나선 소리꾼 신동재씨는 래퍼에게 ‘디스(헐뜯기)’를 당하자 국악 반주로 펼쳐진 두 번째 라운드에서 되레 주춤했다.

 배틀과 디스에 익숙한 래퍼들은 아무래도 공격적이었다. “넌 똑같지 X같지 날 이길 순 없지”와 같은 내용은 양반 축에 속했고 ‘X발’과 같은 욕설을 한 문장 걸러 하나씩 넣는 이도 있었다.

 소리꾼은 이에 위축되기도 했지만 거세게 반격하기도 했다. 조다정씨는 “판소리도 랩 비트에 맞아. 너만 잘 난 거 아냐. 넌 스무 살? 난 서른 살! 그래도 귀요미, 귀요미”라 춤 추고 노래해 400여 관객의 호응을 얻어냈다. “살이나 빼쇼” “넌 돼지” 등 외모를 비하하는 공격을 당한 소리꾼 이승민씨는 “내가 살이 안 쪘으면 너네(관객)들이 좋아하겠냐”라 응수하고, 욕설을 퍼붓는 상대에겐 걸쭉한 판소리 톤으로 “X발”이란 욕을 되돌려주기도 했다.

 8강에는 소리꾼 넷과 래퍼 넷이 진출했다. 8강의 시제는 ‘SNS’. 대진표에 따라 래퍼와 래퍼가 붙기도 하고, 소리꾼과 소리꾼이 맞붙기도 했다. 소리꾼 셋, 래퍼는 단 한 명만 4강에 올랐다. 관객 대부분이 판소리보다는 힙합이 더 친숙할 20대였음에도 목소리 자체에 흥이 실린 소리꾼에게 더 열광한 것이다.

 준결승을 거쳐 소리꾼 이승민씨와 래퍼 한종호씨가 결승에 진출했다. 만 20세 소리꾼과 만 19세 래퍼는 자유 주제로 불꽃 튀는 대결을 벌였다. 우승은 소리꾼 이승민씨가 차지했다.

 이씨는 “판소리를 알리고 싶어서 젊은이들이 많이 올 수 있는 무대에 참여하게 됐다. 국악 대중화를 위한 작업을 평소에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준우승을 차지한 래퍼 한종호씨는 “소리꾼들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음을 내는 게 관객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 것 같다”고 평가하고 “국악과 힙합의 크로스오버 명반을 만드는 게 꿈인데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관객 반응도 뜨거웠다. 클래식을 전공한 이은혜(27)씨는 “국악 공연은 졸리고 지루했는데 랩판소리 배틀은 색다르고 무척 재미있었다”고 했다. 건국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지 2주째라는 아서 벤(26·독일)은 “판소리를 처음 봤는데 흥미진진하고 놀라웠다. 힙합도 그 전에 보던 것보다 더 재미있게 다가왔다. 뜻은 이해 못했지만 비트에 말을 올리는 재주, 퍼포먼스 덕에 친숙하게 들렸다”고 했다.

 세계 첫 랩판소리 배틀은 레드불의 SMB(대학생 브랜드 매니저) 팀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랩과 판소리가 장르는 다르지만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에선 닮았다는 게 기획의 시작이다. 언더그라운드 래퍼는 동영상 예선을 거쳐 걸러냈다. 하지만 소리꾼은 인재 풀이 작고, 보수적인 분위기라 판소리 학과가 있는 전국의 대학을 찾아 다니며 7명을 간신히 모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 우승자가 나온 셈이다. 레드불 관계자는 “언더그라운드 힙합과 판소리를 대중에게 친숙하게 만드는 게 랩판소리 배틀의 목표다. 반응이 좋았던 만큼 제2, 제3의 자리도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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