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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25>라싸(拉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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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직선으로 2578㎞, ‘하늘 열차’로 불리는 칭짱(靑藏)철도로 4064㎞. ‘세계의 지붕’ 티베트의 심장 라싸(拉薩)와 베이징의 물리적 거리다. 직선거리로 라싸는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1360㎞ 떨어져 있다. 종교적으로 볼 때도 라싸는 중원보다는 인도가 도리어 가깝다. 티베트-몽골-만주로 이어지는 과거 초원 세계의 정신적 수도였던 신들의 도시 라싸를 소개한다

티베트와 중원의 교류, 당나라때 시작

‘티베트, 몽골리아, 만주리아’. 1851년 청(淸)나라의 영토를 그린 영국 지도<사진 2>의 제목이다. 지도 아래에는 인도 라다크 지역 레(Leh)의 왕궁, 중국의 만리장성, 라싸 포탈라궁이 그려져 있다. 중원을 둘러싼 거대한 이 지역의 정신세계는 라마교, 즉 티베트 불교가 지배했다. 라싸는 그 중심이다.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역설하는 핵심이익 지역이다. 행정상 시짱장족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다. 반자치가 보장된다. 하지만 티베트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는 없다. 그는 1959년 라싸를 떠났다. 라싸와 베이징은 지리적 거리만큼 심리적 거리도 멀다. 과거에도 그랬다. 라싸의 역사는 곧 티베트의 역사다. 중원과의 교류는 당(唐)대에 시작됐다. 당시 티베트는 토번(吐蕃)의 땅이었다. 시조는 송첸캄포다. 해발 3700m의 라싸를 수도로 삼고 포탈라궁을 처음 지었다.

지난 8월 티베트 최대의 축제인 ‘쇼똔 페스티벌’ 기간, 라싸 포탈라궁 앞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쇼’는 티베트어로 요거트, ‘똔’은 축제를 뜻한다. 17세기 하안거(夏安居)를 끝낸 라마승에게 신도들이 요거트를 시주한 데서 유래했다. [중앙포토]

인도에서 불교와 문자를 도입했다. 토번은 강했다. 당 태종이 문성공주를 송첸캄포에게 시집 보냈다. 부마국으로 삼기 위해서다. 회유책이었다. 티베트의 기세에 당제국이 밀렸다. 당나라 이후 티베트는 초원의 유목세계와 거래했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 팍빠를 스승으로 모셨다. 종교가 정치와 손잡았다. 결합은 이어졌다. 15세기 말에 등장한 다얀 칸이 알타이 산맥 동쪽의 몽골 초원을 통일했다. 그의 손자 알탄 칸은 명(明)의 베이징을 위협했다. 현재의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수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근거지를 세웠다. 당시 티베트 세계에서는 지금의 칭하이(靑海)성에서 활동하던 승려 총카파가 신흥 개혁교파인 겔룩파(派)를 창시했다. 황모파(黃帽派)로 불리던 겔룩파는 세력이 급성장했다.

1578년 알탄 칸은 겔룩파의 지도자 소남 갸초를 만났다. 3세기 전 쿠빌라이와 팍빠의 만남과 비슷했다. 알탄 칸은 소남 갸초에게 바다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란 뜻의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소남 갸초는 알탄 칸을 불교에서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일컫는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인정했다. 종교 지도자와 세속의 군주가 힐링(치유)과 무력을 거래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티베트 불교는 몽골 세계로 빠르게 침투했다.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을 비롯해 곳곳에 티베트 불교 사원이 우후죽순처럼 솟았다.

청과 달라이 라마의 협력 영국 개입으로 깨져

 1630년대 티베트에서 교파 간 다툼이 격화됐다. 몽골 부족이 해결사로 나섰다. 그들은 역대 최고의 달라이 라마로 불리는 5대 달라이 라마에게 티베트의 지배권을 헌상했다. 5대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 포탈라궁을 다시 증축했다. 1670년대 후반 톈산(天山)산맥 북쪽의 초원지대에 ‘최후의 유목제국’ 중가르를 세운 갈단이 등장했다. 중가르와 신흥 제국 청(淸)은 5대 달라이 라마 입적 이후 티베트를 다퉜다. 몽골과 만주족의 티베트 쟁탈전이다. 1720년 청의 강희제(康熙帝)가 승리했다. 중원의 황제가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호위하며 라싸에 입성했다. 청은 주장대신(駐藏大臣)과 소수의 군대를 상주시켰다. 티베트-몽골-만주가 통합됐다. 서양도 티베트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18세기 말 인도지배체제를 구축한 영국은 19세기 중엽 네팔·부탄을 넘봤다. 목표는 티베트였다. 1888년 영국은 티베트를 공격해 들어왔다. 청은 영국에 티베트에서의 배타적 특권을 양보하고 명목상의 주권을 지켰다. 쇠락하던 청조였지만 티베트에서는 강공을 펼쳤다. 1906년 장음당(張蔭棠)을 새 주장대신으로 파견했다. 티베트 왕(제후)의 지위를 되살리고 한인(漢人) 감독을 처음으로 파견했다.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통치권은 박탈당했다. 티베트는 저항했다. 당시 티베트 지배층은 친청, 친영, 친러파로 분열됐다. 1904년 영국군이 라싸를 공격했다. 달라이 라마 13세는 러시아의 사주를 받은 몽골 군대의 도움을 받아 울란바토르로 몸을 피했다. 1908년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으로 갔다. 1909년 영국과 협상에 성공해 라싸로 돌아왔다. 동부에서는 서양에 밀리던 청조였지만 1910년 쓰촨(四川) 지역의 군 병력을 라싸로 다시 보냈다. 달라이 라마는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인도로 물러났다. 이 장면은 49년 뒤인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재현했다.

마오쩌둥의 ‘해방’과 저항

1851년 영국이 제작한 지도 ‘티베트, 몽골리아, 만주리아’. [중앙포토]

 1911년 신해혁명으로 황제 지배체제가 무너졌다. 각 성은 독립 열풍에 휩싸였다. 쓰촨 출신 티베트 주둔군도 분열했다. 인도에 머물던 달라이 라마 13세는 인도 총독의 지원 아래 1912년 4월 측근 세력을 라싸에 파견해 한인 관료와 중국군을 축출했다. 달라이 라마는 6월 라싸로 귀환,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티베트는 영국과 중화민국 사이에서 소강 상태를 맞았다. 1913년 10월 인도에서 중국·영국·티베트 대표가 회담을 했다. 영국은 티베트를 몽골처럼 내외 두 부분으로 나눠 외티베트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중국이 거부했다. 회담은 결렬됐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맥마흔 라인을 선포했다. 외티베트에 대한 실력행사에 나섰다. 맥마흔 라인은 이후 중·인 국경분쟁의 이유가 됐다. 1940년 다섯 살이었던 지금의 달라이 라마 14세가 즉위했다. 1950년 10월 전 세계가 6·25전쟁에 주목하고 있을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은 군대를 티베트로 진격시켰다. 청조는 만주족의 나라였다. 마오의 진격은 한족의 첫 티베트 무력 지배다. 11월 시짱장족자치구를 세웠다. 1959년 티베트는 독립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군화로 대답했다. 봉기는 진압됐고 달라이 라마 14세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다. 인도에 망명정부가 세워졌고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1989년 초 티베트의 또 다른 영적 지도자 판첸 라마가 사망했다. 3월에는 59년 봉기 30주년 소요가 일어났다. 지금은 은퇴한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이 당시 티베트 1인자였다. 진압 병력의 최일선에서 헬멧을 쓰고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후진타오 집권 2기가 시작된 2008년 3월 티베트가 다시 봉기했다. 실패였다. 지금도 독립을 외치는 티베트 승려의 분신 소식이 멈추지 않는다. 라싸는 신들의 도시란 고대 티베트어에서 나왔다. 라싸의 신들은 티베트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포탈라궁, 달라이 라마도 "방 몇개인지 모른다”

중국 베이징에서 티베트 라싸를 잇는 세계 최장의 칭짱철도가 티베트 고원지대를 달리고 있다. [중앙포토]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은 알싸하다. 조국을 잃은 반골의 오스트리아 등반가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 인생관이 바뀐다는 내용이다. 라싸의 랜드마크 포탈라궁은 영화의 또 다른 주연이다. 포탈라는 관음보살이 사는 곳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왔다. 라싸시 훙산(紅山) 위에 송첸캄포가 처음 지었다. 13층 117m 높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에 위치한 가장 큰 단일 건축물이다. 포탈라궁은 종교적 공간인 붉은 홍궁과 정치적 공간인 하얀 백궁으로 나뉜다. 2000개의 방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달라이 라마 14세마저 자서전에서 몇 개의 방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토로한 신비의 궁전이다. 포탈라는 성과 속을 장악했던 달라이 라마 권위의 구현물이다. 외국인이 라싸를 관광하려면 중국 비자를 받은 뒤 별도로 티베트 여유국으로부터 여행 허가를 받아야 한다. 보통 3주가 걸린다. 5월부터 10월까지 포탈라궁 입장료는 3만6000원으로 비수기보다 두 배로 오른다. 게다가 하루 전에 입장권을 예매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궁 안에서는 모자를 쓰거나 사진을 촬영할 수 없다. 또한 한 시간 안에 관람을 마쳐야 한다. 올 3월 28일 오전 10시 포탈라궁 앞 광장에 3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오성홍기가 게양되면서 이른바 시짱 100만 농노 해방 54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 행사는 다음날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4면에 크게 보도됐다. 현재 티베트에서 중국의 위상은 공고하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올해 78세다. 15대 달라이 라마의 등장이 멀지 않았다고 보기에 충분한 나이다. ‘청나라 황제’(지금은 베이징 정부 격)는 복수의 차기 달라이 라마 후보자 중 한 명을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 15대 달라이 라마를 결정할 순간에 티베트 망명 정부와 베이징은 대립할 것이다. 누가 지명한 달라이 라마가 정통성을 인정받을 것인가. 티베트와 라싸의 운명을 좌우할 시간이 멀지 않았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전한다. “라싸에 못 가본 이들은 모두 언젠가 포탈라궁 앞에 설 날이 오리라 깊이 믿는다. 라싸를 떠난 이들은 모두 언젠가 스스로 라싸로 돌아갈 날이 올 것을 알고 있다.”

티베트 최고의 성지는 카일라스

 티베트 불교도에게는 라싸의 포탈라궁보다 조캉사원을 더 신성시한다. 일생에 한 번은 오체투지로 순례해야 하는 성지다. 하지만 티베트 최고의 성지는 라싸에서 1300㎞ 떨어진 곳에 있다. 성산(聖山) 카일라스(6714m)다. 불교·힌두교·뵌교(티베트 토착 신앙)·자이나교 4개 종교가 성산으로 여긴다. 불자들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이라고 믿는다. 힌두교도들은 파괴와 창조의 신인 시바신이 사는 곳이라고 믿는다. 카일라스는 갠지스·인더스·수트레이·얄룽창포 등 아시아 4대 강의 발원지다. 티베트어로 ‘캉린보체(Kangrinboq<00EA>)’다. ‘눈(雪)의 보석’이란 뜻이다. 카일라스는 인간의 등정이 허락되지 않는다. 신의 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등정 대신 카일라스를 한 바퀴 도는 ‘코라’라 불리는 순례를 한다. 한 번의 코라는 일생의 업(業·Karma)을 소멸시킨다. 많은 순례자들이 평생 13번의 코라를 한다. 말띠해(午年)에는 한 번의 코라가 12번의 공력을 얻는다고 해 순례객이 쇄도한다. 53㎞, 2박3일 여정의 코라에 나서는 한국인도 많다. 올여름 라싸와 카일라스를 순례한 뒤 신장이나 네팔로 나오는 18~19일 여정의 여행 상품이 만원을 이뤘다는 소식이다. 모두 인생의 무거움을 벗고 깨달음을 꿈꾸는 이들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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