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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칼럼] ‘特上 보고서’의 위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0호 30면

‘특상(特上)’. 국가정보원이 대통령 당선인을 위해 작성한 첫 브리핑 보고서엔 붉은 색깔로 이 같은 글자가 찍힌다. 국정원장이 직접 들고 들어간다. 보고서를 펴든 당선인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집권 전에 보좌관들이 올리던 보고와는 차원이 다른,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들이 가득하다. 눈엣가시 같았던 정적들의 비리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런 정보들을 보여주며 국정원장은 충성을 맹세하고, 당선인은 그의 손을 잡아준다. 국정원의 공작정치에 당해왔다고 주장하던 역대 대통령 당선인이 집권 뒤 국정원에 힘을 실어주는 모순이 반복되는 이유다.

 과거 국정원은 정권에 부담이 컸던 상황에서 구원타자 역할을 하곤 했다. 1989년 현대중공업 같은 강성 노조의 파업이 잇따를 때 문익환 목사 방북, 서경원 평민당 의원 밀입북 사건이 국정원(당시 안기부)발로 연달아 터졌다. 여권을 코너로 몰던 야권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정국은 시나브로 진정됐다. 91년 시민·대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잇따를 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터지면서 시위가 잦아든 배후에도 국정원의 수사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건 세상이 아는 얘기다.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낸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도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으로 전직 국정원장이 댓글 의혹으로 기소되고, 야권에서 ‘대선 불복’ 움직임이 이어지는 국면에서 터졌다. 심어놨던 정보원이 노출되고, 혐의자들이 도주할 우려가 컸기에 수사 결과 발표를 더는 늦출 수 없었다는 게 국정원 측 설명이다. 그럴 만한 정황은 충분히 있었다고 보인다. 시점이야 어쨌든 종북과 폭력으로써 대한민국 헌정체제에 도전하려는 세력의 실체가 파악되면 즉각 발본색원해야 하는 게 국정원의 책무다. 그들은 할 일을 했다.

 우려스러운 건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정원 스스로 개혁 요구를 축소하려 들거나 정부·여당이 국정원의 수사 결과에 기대어 진짜 할 일을 소홀히 하려 들 가능성이다. 지금은 80, 90년대와 달리 국민의 민도(民度)가 선진국 중에서도 윗길 수준이다. 종북 세력 잡는 것과 국정원 개혁은 별개라는 점, 그리고 공안 수사만이 국정의 전부가 아니란 점을 국민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집권 세력이 공안 수사 성과를 믿고 경제민주화를 미루거나 민생 살리기를 게을리하면 국민은 금방 심판에 나설 것이란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60%를 넘고 있는 건 성공적인 대북정책과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 재벌에 대한 엄격한 사정, 깨끗한 자기관리에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경제·민생 분야에서 얻은 점수는 아직 빈약하다. 공안 수사와 별개로 박근혜정부가 경제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이유다.

 그뿐 아니다. 국민에게 약속한 국정원 개혁을 본격화해 안보 강화와 국익 증진에 제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국회 감시를 받지 않고 천문학적인 예산과 조직을 굴리면서도 북한의 후계자 이름(김정은) 하나 몰라 ‘김정운’으로 보고했던 과거의 부실한 구조를 뿌리 뽑아야 한다.

 민주당 역시 정신을 차려야 한다. 공안정국 타령만 하다간 또다시 당하기만 할 뿐이다. 여권의 공안정치 시도를 차단하는 것은 야당의 기본 업무다. 하지만 경제·민생에서 대안과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민주당은 차기 총선·대선에서도 낭패를 겪을 수 있다. 국민들이 여당을 욕하면서도 야당을 선택하지 않는 보수 집권 사이클이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미 대북정책은 박근혜정부가 접수했다. 북한 관련 이슈는 보수 정권이 과감한 해법을 낼 수 있다는 역설이 현실화된 것이다. 어쩌면 민주당의 기회는 민생·경제 쪽에 있을지 모르겠다. 대기업의 강성 노조를 설득해 비정규직과 실업자들이 정규직 근로자와 상생할 길을 열 수 있는 힘은 민주당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지 기반에 고통 분담을 설득한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의 지혜와 용기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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