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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초월' 협동조합의 패자부활 도전 과연 성공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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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모(30)씨는 3년 전 서울의 한 사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프로 광고인이 꿈이었다. 졸업 후 광고회사의 호주 법인 인턴으로 들어갔다. 6개월간 복사·청소·설거지 등 허드렛일만 하다 귀국했다.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200여 개 기업에 입사원서를 제출했다. 학점·어학성적·자격증 등 ‘스펙’을 정성껏 나열했지만 줄줄이 서류전형 탈락이었다. 면접 기회가 주어진 기업은 딱 두 곳. 두 번의 면접도 낙방이었다. 올해 초 한 회사에서 합격 통보가 왔다. 직원이라곤 사장과 사장 친구, 딱 둘이었다.

 “1년 안에 직원이 50명으로 늘어날 거다.” 사장님의 장담을 믿고 입사해 열심히 일했다. 얼마 후 회사를 먹여살리던 광고주가 떨어져나갔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벌써 나이 서른. 출발부터 암담한 인생이었다. 우연히 사회적 협동조합 ‘워커스(WALKERS)’의 교육생 모집공고를 보았다. 5개월간 광고·마케팅전략·영상제작 등을 가르치는데, 수강료 500만원은 졸업하고 ‘취직이 될 경우’ 25개월에 걸쳐 나누어 내면 된다고 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지원했는데 뜻밖에도 합격. 지난달 1일 교육이 시작됐다.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한복판 수산물가게 건물 3층 워커스(대표 강수현)에선 이씨와 비슷한 처지의 수강생 20명이 ‘패자 부활’을 꿈꾸고 있다. 취업 실패를 밥 먹듯 한 이들이 많아 남자 평균 나이가 30세다. 특이한 것은 선발 때 지원서에 이름과 생년월일 말고는 아무 것도 적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른바 스펙 초월, 스펙 파괴 방식이다. 대신 ‘인생 마일리지’라는 기준을 만들어 면접 때 대화를 나눈다. ‘취업 장벽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1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신체적 핸디캡을 갖고 있지만 극복했고 장점으로 생각한다’ ‘가출한 경험이 있지만 내 인생의 약이 되었다’ 등이다. 20명 중에는 고졸자도 몇 명 있지만 교육생들은 서로 출신 학교를 묻지 않는다. 교육의 키워드는 헌신·용기·협동.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끼리 돕고 끌어준다. 이씨는 “다들 나처럼 꺾일 만큼 꺾여보고 고생할 만큼 고생해 본 청춘들”이라고 말했다.

 워커스의 대표 멘토 조동원(56)씨는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 같은 문구로 이름을 날린 카피라이터 출신이다. 지난 총선·대선에서 새누리당 홍보본부장을 맡았었고, 한때 테마파크 사업을 벌이다 신용불량 위기에 몰리는 등 자신도 굴곡이 적지 않았다. 스카이(서울·고려·연세대) 위주, 스펙 만능 취업 풍토가 이대로 계속되면 나라가 기운다는 위기감에서 워커스를 설립했다. 스펙을 높이려고 대리시험까지 저지르는 세태에서 과연 이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제발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끝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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