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민에 씁쓸함 남긴 전두환 자진 납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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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가 미납 추징금 1672억원을 자진 납부하기로 했다. 1997년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16년 만에 모든 사법적 절차를 마무리짓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씁쓸하기만 하다.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는 어제 서울중앙지검 현관에서 대국민 사죄문을 발표했다. 재국씨는 “추징금 환수 문제와 관련해 그간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해 저희 가족 모두를 대표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씨 명의의 연희동 자택 등 주요 납부 재산목록을 공개했다. 이에 검찰은 “이미 드러난 불법 행위는 원칙대로 수사하되 증거와 책임 정도, 자진 납부 등을 감안해 처리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번에 자진 납부를 결정하기까지 전 전 대통령과 그 일가가 보여온 태도다. 전 전 대통령이 1997년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은 뒤 지금까지 납부한 돈은 533억원에 그쳤다. 그는 2003년 법원의 재산명시 명령에 ‘예금자산 29만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지난 6월 국회에서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이 통과되고 검찰이 압수수색과 함께 강도 높은 수사에 착수하면서였다. 이번 납부 결정은 처남 이창석씨가 구속되고 차남 재용씨가 검찰에 소환되는 등 전방위 압박이 계속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십수 년을 버텨오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자 백기를 든 것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법적·정치적·역사적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볼 수 없었다. 본인과 국가 모두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납 추징금을 환수하게 된 것은 분명 검찰의 성과다. 채동욱 검찰총장은 “신발 한 짝이라도 환수하라”며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번 수사 전까지 과거 정부와 검찰이 추징금 환수에 적극 나서지 않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4년 재용씨의 조세포탈 재판에서 은닉 재산이 확인됐음에도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두환 추징법이란 특별한 입법에 기대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법조계에선 “16년이 흐르는 사이 전 전 대통령 일가가 애초의 비자금으로 훨씬 많은 재산을 불렸을 것이란 점에서 남는 장사를 한 셈”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2분간의 사과로 모든 상황이 끝난 건 아니다. 전 전 대통령 일가가 진심으로 국민에게 사죄한다면 추징금 환수 계획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검찰 역시 조세포탈 등 혐의에 대한 수사를 철저하게 진행해야 한다. 부정축재에 대해 사법적 정의가 제대로 세워지는지 국민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