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아침]-'귀뚜라미 보일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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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천양희(1942~) '귀뚜라미 보일러' 부분

바퀴벌레에 바퀴가 없고 나팔꽃에 나팔이 없고
연신내에 내가 없고 압구정에 정자가 없네

귀뚜라미 보일러에 귀뚜라미가 없네

작살나무는 작살을 모르고 복수꽃은 복수를 모르고
재봉새는 재봉을 모르고 물레새는 물레를 모르네

귀뚜라미는 귀뚜라미 보일러를 모르네

'며느리밑씻개'라는 한해살이풀이 있다. 그 풀에 미운 털 같은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은 시어머니들이 아니었을까? 이름이 없었던 풀은 어느 때부터인가 원치도 않았던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그 이름은 여전히 풀의 소유가 아니고 풀이 이름의 소유인 것도 아니다. 더러운 이름을 붙이든 멋진 이름을 붙이든 풀은 이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풀의 마음은 다 그렇다. '미치광이풀'조차 제 이름 때문에 미치게 괴로워하거나 화내는 법이 없다.

최승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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