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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스즈끼」(영목일)씨는 그때까지 한국에는 한번도 가본일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건만 초대「출입국 관리국장」이 되고 보니까 일본의 출입국 사무란 대부분이 한국 사람에 관한 일이요, 모든 분규도 또한 한국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과거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를 공부하던 중에 전기한 바와 같이 6·25동란으로 인한 한국인 학생의 밀항문제가 야기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도 잘 알고 또 항상 존경하여 마지않는 영친왕의 부탁도 있고 하여 순전히 인도적 견지에서 다수의 밀항 학생을 구제해 준 것인데『어버이의 마음을 자식이 모른다』는 말과 같이「스즈끼」국장의 그와 같은 생각을 출입국 관리국 관리들은 이해하지를 못했다.
『밀항해 온 한국인은 그것이 상인이건, 학생이건「오오무라」(대촌) 수용소에 잡아 두었다가 한국으로 송환할 일이지, 학생이라고 해서 석방한다는 것은 법률 위반이며「스즈끼」국장은 사람이 좋아서 쓸데없는 일만 한다』고 국장을 도리어 비판하여「스즈끼」씨는 개인적으로는 큰 손해를 본 것이었다.
그것은 어쨌든「스즈끼」씨의「휴머니즘」으로 밀항 학생을 구제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이번에는 그들의 입학 문제가 또 큰 문제였다. 밀항해 온 학생은 거의 대개가 일본말을 몰랐을 뿐 더러 6·25 이후 소위「의용병」으로 붙들려 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난살이를 하느라고 공부다운 공부를 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명을 걸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일본에 밀항해온 청년들인 만큼, 더구나「오오무라」수용소에서 석방될 때 일본의 체류기한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라는 조건부로 되어 있으므로 좋으나 그르나 학교는 꼭 들어가야만 되었다.
그러나 보통 방법으로는 입학 할 수가 없으므로 하루는 영친왕이 경응의숙 총장「고이스미·신조오」(소천신삼) 씨를 친히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고이스미」씨는 경응의숙의 창설자로「와세다」(조도전) 대학의「오오꾸마」(대외중신) 와 함께 근대 일본이 낳은 대 인물이라는「후꾸사와·유기찌」(복택유길)의 후계자로서 인격과 식견이 높은 경제학자이며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학문적으로 공박할 수 있는 유일한 실력자였다. 그리고 그는 대학 총장을 사임하고 그후 황태자(지금)의 사부가 된 만큼 일본 황실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였으므로 자연 영친왕에 대해서도 항상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영친왕의 뜻을 받들어 필자가「소천」씨를 경응의숙으로 방문하고 영친왕의 뜻을 전하였더니 그는 펄쩍뛰며 『전하가 여기를 오시다니 될 말이냐』고 하면서 자기가 왕저로 가서 뵙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왕저는 그전과 달라서 양관의 본 채는 좌등 참의원 의장의 관사가 되었고 전하는 이전 하녀가 쓰던 부속 건물에 계시므로 누구를 초대할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는 한참동안 생각한 끝에『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은좌에 있는 교순사로 모시고 오시지요』라고 하였다.
「고오준샤」(교순사)는 경응의숙 졸업생들이 돈을 내어 지은 호화스러운 빌딩으로 경응의숙의 관계자나 졸업생들만 이용할 수 있는 구락부였다.
며칠 후 필자가 영친왕을 모시고 교순사에를 갔더니 그날은 일기가 몹시 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소천」씨는 벌써「프륵·코트」의 예장을 하고 문 앞에 서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자동차가 닿자마자 손수 자동차의「도어」를 열고 최 경례를 하였다.
이윽고 영국식으로「파이어·플레이스」(벽에 달린 난로)가 있는 제일 좋은 방으로 영친왕을 안내한「소천」씨는 난로 앞에는 영친왕을 앉으시게 하고 자기는 문 앞에 서서 도무지 앉지를 않고 머리를 수그린 채 영친왕이 무슨 말씀을 하면 그저『예! 예!』하고 대답만 할 뿐 도무지 말이 없었다.
영친왕은 보다 못해서『선생이 그렇게 하면 내가 곤란하니 제발 이리로 좀 앉으시오』라고 하시며 옆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니「소천」씨는 그 제서야 가 앉는데 그나마 궁둥이를 소파 끝에 조금 대었을 뿐 두 다리를 모으고 흰 장갑을 낀 두 손을 무릎 위에 공손히 놓고 있는 것이 여간 근엄하지를 않았다. 이윽고 점심 식사를 나누면서 영친왕의 말씀을 다 듣고 난「소천」씨는
『잘 알았습니다. 경응의숙의 창설자「후꾸사와」는 그 옛날에 김옥균, 박영효씨등이「갑신정변」을 일으키려고 일본에 왔을 때 그들의 부하와 함께 수십 명을 숙식시켜 준 일이 있는 만큼 경응의숙과 한국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을 뿐더러 지금 한국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이때에 저희들도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가능한 한 최대의 노력을 하겠노라고 하였다.
그 후「소천」씨는 그의 약속대로 경응의숙은 물론이요, 다른 대학에까지 말을 해서「특별 유학생」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한국인 학생을 구제해 주었던 것이다.
필자는「소천」씨를 만나 전날 영친왕이 탄 자동차가 떠나 올 무렵 때마침 날리는 흰 눈을 머리 위에 맞아가면서 언제까지나 교순사 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전송하던「소천」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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