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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제2본영…수원(6)|「스미드」기동부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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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북괴군과 교전한 미 지상군은 「찰즈·B·스미드」중령 부대였다. 미 해·공군은 6월 27일 하오부터 적과 교전상태에 들어갔지만 지상군은 29일에 「맥아더」원수가 수원에 비래한 후 「트루먼」대통령이 전선투입을 결정하고, 또한 병력이 일본에 있기 때문에 7월 5일에야 접적할 수 있었다. 미 육군과 북괴군이 처음으로 맞붙은 이「오산 전투」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을 그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뜻깊고 기록에 남길 만 하다.
우선 「T·R·페래버크」저 『이런전쟁』(This Kind of War)을 통하여「스미드」기동부대의 출동 경위부터 살펴보면….

<20세 미만의 초년병 대원>
「1950년 7월 1일 상오 8시에 제21연대 제1대대장 「찰즈·B·스미드」중령은 판부 공군기지에서 제24사단장 「윌리엄·F·딘」소장 앞으로 출두했다. 「스미드」뒤에는 부슬비를 맞으며 공로 한국으로 투입될 제1진인 4백 6명의 장병이 서 있었다. 그들은 야전복 차림에 철모를 쓰고 소총과 형형색색의 낡은 무기들을 들고있었다. 개개인이 휴대한 것은 1백 20발의 실탄과 이틀치 「레이션」이었다. 거의가 20세 미만에다가 전쟁의 총소리를 들어본 일이 있는 병사는 여섯명 중 한명 꼴도 되지 않았다.
갈색머리를 짧게 깎고 키가 큰 「딘」소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스미드」중령과 악수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부산에 도착하거든 곧 대전으로 올라가게. 북괴군을 될 수 있는 대로 부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막아야겠어. 가능한 한 북쪽에서 큰길을 막게. 한국에 가면 「존·H·처치」준장과 연락을 취하게. 연락이 안닿거든 대전으로 가보고 가능하면 더 북쪽으로 가 보게. 그이상 줄 정보가 없어서 미안하네. 행운을 빌겠어. 자네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스미드」중령은 경례를 붙이고 나서 부하들에게 대기하고있는 C54수송기에 오르도록 명령했다.

<선편 부족으로 분산투입>
이들은 「맥아더」원수가 위력의 과시로서 북괴군 진격을 막으려고 한국에 투입되는 첫 미 지상군인 「스미드」기동부대였다. 「딘」소장은 휘하 24사단 전 병력을 한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사단은 일본각지에 분산돼 있는데다가 그 병력을 6개 항구에서 실어낼 배편이 마련되지 못했다. 부득이 병력을 분산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그 선진이 「스미드」기동부대였다.
7월 4일에 「스미드」부대는 수원과 그 수「마일」남쪽의 오산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를 끼고 진을 쳤다.
비가 계속 내려 날이 좀 찼지만, 간선도로로부터 약3백「피트」높이에 있는 능선의 고지에서 「스미드」중령은 거의 수원까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맥아더」전방지휘소의 「존·H·처치」준장은 「스미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쪽에서 약간 전투가 있을거요. 「탱크」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을 만한 병사만 약간 배치하면 되겠소. 가서 사기를 돋워 주도록 하시오.』
7월 5일 새벽 「스미드」기동부대는 자신만만했다.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가를 알면 북괴군은 곧 되돌아가리라는 것이 대부분 병사들의 생각이었다.

<미병들 임무 모르고 참전>
이 단계에서는 두려워하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려 기차로 갈아탈 때 한국인들은 악대를 연주하면서 열광적인 환영을 베풀어주었다. 그들은 이번 작전이 경찰행동이며 곧 임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이러니 마음이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병들이 「슈샤인·보이」와 아가씨 한명씩은 거느리고 있었다. 미군 소위의 수입이 일본각료수입에 맞먹는 나라에서는 2등병의 생활도 그리 나쁠 것은 없었다.
인구가 조밀한 일본에는 참된 뜻에서 훈련지역이라곤 없다. 그러니 미8군의 「워커」사령관이 시끄럽게 굴기는 했지만 별로 할 일이라곤 없었다. 훈련은 그들 비위에 거슬렸고, 그들 출신지의 국회의원들은 너무 심한 훈련을 시키지 않도록 연신 압력을 가했다.

<훈련 않고 안일했던 미병>
이들은 몸이 비대해졌고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라곤 없다고 믿고 있었다.
군대의 기본적인 기능은 전투에 있으며 군인의 운명은 고난을 겪는 일이며,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고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스미드」기동대원들이 적을 얼마나 얕잡아보고 당당한 기세로 전선에 뛰어들었는가는 이 부대를 지원한 한국군의 한 연대장 증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백인엽씨(당시 육본직속 독립 제17연대장 대령·예비역 육군 중장·현 인천선인학원이사장·51)는 『옹진반도에서 철수한 우리연대는 대전에서 집결, 재편한 다음 한미합동 작전계획에 따라 「스미드」기동부대를 지원하기로 했읍니다. 7월 3일 하오에 서정리에서 미군대대와 합류, 나와 「스미드」중령이 작전계획을 상의했지요. 나는 『문제는 적 「탱크」인데 당신들이 이 문제만 해결해주면 우리 힘만으로도 적을 저지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미군의 적 「탱크」에 대한 대비를 알아 봤지요. 그러자 「스미드」중령은 2·36「인치」「로키트」포를 가지고 왔는데 적「탱크」같은 것은 문제없다고 아주 가볍게 말해요. 그리고는 2·36「인치」「로기트」포 6문과 탄약 10여발을 나누어주더군요.

<로키트포 맞고도 탱크 무사>
그는 「북괴군따위는 문제도 안된다. 오늘밤에 수원까지 진격하겠다」고 장담한단 말이예요. 나는 속으로 「이자가 어지간히 덤비는 군」하고 생각했읍니다. 하긴 태평양 전쟁때 일본군을 때려부순 경험이 있는 그였으니깐 북괴군쯤 깔본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스미드」중령은 수원까지 북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양이지만 우리는 신성모 국방으로부터 「미군을 도와 진격하라」는 명령만 받았지 어느 지점까지 북상하라는 「작명」은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스미드」중령에게 「적은 야간위주의 훈련이 잘돼있고 수원쪽엔 많은 적이있어 야간북진은 위험하니 우선 유리한 지점에 포진하자」고 타일렀읍니다. 처음에는 그가 「갓 댐 유」라고까지 폭언을 하면서 덤볐지만 결국은 내말을 들었어요.
서정리 북방의 능선에 국도를 좌우로 오른편 고지에 우리연대 1천 8백명이 포진하고 왼편에 「스미드」부대가 자리를 잡았지요. 4일 밤 10시쯤 되니까 수십대의 적「탱크」가 보병도 거느리지 않고 국도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읍니다. 적은 우리가 포진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것을 미군이 준 2·36「인치」「로기트」포로 10발쯤 때렸으나 끄떡도 하지 않아요.

<머스탱기 오폭 백여명 사상>
그러자 적「탱크」가 우리고지를 포위하고 맹렬한 포격을 가해와 부득이 평택으로 후퇴했읍니다. 왼편의 「스미드」부대와는 연락이 안돼 공동보조를 취하지 뭇했지요. 그 이튿날 아침에 평택상공에 9대의 「머스탱」전투기가 날아와 우리 부대원들이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는데 느닷없이 기총소사를 해서 1백여명의 사상자를 냈읍니다. 나도 이 오폭으로 오른쪽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됐읍니다.』
당시 「스미드」기동부대 상병으로 출전했다가 현재도 주한 미군에 근무하고 있는 한 미군 병사도 적「탱크」 때문에 진지가 무너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행기 타고야 참전알아>
▲「빅·델라쿠르즈」씨(당시「스미드」대대 B중대원·상병·현 미 ○사단 ○공병대대 인사계·주임상사·48) 『7월 1일 아침에 갑자기 비상이 걸려 우리는 완전무장을 하고 집합했읍니다. 제21연대의 B중대와 C중대만이 전원 모였지요. 우리는 그때 토요일마다 40㎞의 「로드마치」(행군) 훈련을 했기 때문에 또 그 훈련인줄만 알았지요.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안 사람은 장교 몇 명뿐이었읍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니까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려주더군요.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린 후 기차와 「트럭」으로 갈아타고 대전을 거쳐 평택까지 올라 갔읍니다. 7월 5일 새벽이 되니까 요란한 포성이 들려요. 우리가 죽미령고개의 1백 17고지에 진을 치고 있었고 아군포대는 뒤에 있었는데 상오 8시쯤에 아군의 1백 5「밀리」포격이 시작되더군요. 그런데 서너시간 계속되던 아군포격이 웬일인지 갑자기 중지되면서부터 적은「탱크」를 선두로 쳐들어왔어요.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는 것은 우리는 2·36인치의 「바주카」포 밖에는 없었는데 이것으로 아무리 쏴도 소용이 없어요. 3·5인치 포만 있어도 부술 수 있었는데….

<「탱크」격파할 특공대 조직>
사태가 이쯤되니까 「스미스」중령의 명령으로 「탱크」격파 특공대를 조직했읍니다. 수류탄을 들고 「탱크」로 접근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집어넣는 거지요. 5명이 한조가되어 2차에 걸쳐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세번째로 「월포드」1등병이 성공해서 적「탱크」를 부쉈읍니다. 이런식으로 적「탱크」3대를 파괴했지만 워낙 우리보다 10배나 넘는 적의 공격으로 「스미드」부대는 분산, 후퇴할 수밖에 없었읍니다. 나는 한국군 통역인 이은수씨와 서너명의 미사병과 함께 감자와 콩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평택까지 내려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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