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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돌십자가는 필시 서역을 떠돌다 왔으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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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호 24면

에페수스의 대리석 거리는 그간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거기에는 마리아와 바오로의 발걸음도 있으리라. 사진작가 정철훈

터키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곳에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기원전 6~7세기에 건립한 식민도시 에페수스의 유적지가 있다. 중국의 자오허(交河),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 등 그간 우리가 방문한 중앙아시아의 고성들이 흙무더기로 남은 반면, 에페수스의 건물들은 대리석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화려했던 옛 시절을 짐작하게 한다. 현대 도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도서관과 대극장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섰다. 주변 상황 으로 미뤄볼 때 먼 옛날엔 이 길이 곧장 항구로 이어졌을 걸로 짐작됐다. 그러나 그동안 쌓인 토사 탓에 지금은 몇 ㎞ 더 나가야 에게해를 볼 수 있다. 거기까지 가면 에페수스 관광이 거의 다 끝난 셈이지만, 기운을 조금 더 내 유적지 끄트머리에 있는 마리아성당까지 보는 게 좋다.

실크로드 대장정<2부> ⑥ 터키의 에페수스

마리아성당 옛터는 꽤 그럴듯하다. 사도행전을 읽은 사람이라면 에페소(에페수스를 가톨릭에서 부르는 말)라는 말에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떠올릴 것이다. 사도행전 제19장을 보면 에페소에는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전도에 나선 사도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그 모형을 사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데메트리오스라는 상인이 장사를 방해한다며 분통을 터뜨리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토착신앙과의 불화로 바오로는 꽤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성서학자들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보내는 둘째 서간 제1장 9절에 나오는, ‘사실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라는 구절을 바오로의 투옥과 연관을 짓는다.

성모 기리는 첫 성당이 왜 에페수스에?
바오로는 2년 동안 에페소에 머물렀는데, 고린도에서 보낸 첫째 서간 제15장 32절의 “내가 에페소에서 이를테면 맹수와 싸웠다고 한들”이라는 구절을 통해 그곳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오순절이 되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열리기 때문에 에페소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바오로가 말하는 큰 문이란 바로 매년 열리던 아르테미스 여신제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축제가 열리면 소아시아 전역과 에게해 섬들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로 당시 여신 숭배는 일반적이었다. 이런 전통은 그리스도교 전파 이후, 자연스럽게 성모 숭배로 이어진 듯하다. 최종적으로 파괴된 이후, 아르테미스 신전의 대리석 일부는 마리아성당 건립에 재활용됐다고 하니 말이다.

하나 성모 마리아와 에페수스의 인연은 이보다 더 깊다. 예수의 뜻에 따라 성 요한과 여생을 보낸 성모 마리아가 선종한 곳은 오랫동안 예루살렘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왜 에페수스에 세계 최초로 성모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겠느냐는 의문에서 에페수스 선종설이 12세기부터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 단순한 의문은 1800년께 독일의 안나 카타리나 엠머릭 수녀가 환시 속에서 본 집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면서 큰 힘을 받는다. 그녀는 그 집이 성모 마리아가 선종한 집이라고 말했는데, 1881년 프랑스 사제 아베 줄리아 쿠예는 에페수스에서 그녀가 묘사한 것과 똑같은 집을 발견했다. 물론 안나 카타리나 수녀는 에페수스 근처에도 간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현재 에페수스에 있는 동정 마리아의 집은 1951년 교황 비오 12세가 성지로 결정한 이래 여러 교황들이 다녀가는 중요한 곳이 됐다.

이런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대리석 길을 걷노라면 매일 열정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던 바오로도, 성모 마리아도 이 길을 걸었으리라는 생각에 2000년 전 역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다. 한편 마리아성당의 녹슨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한 가지 사실을 더 떠올리는 게 좋겠다. 그건 바로 이 성당의 그리스식 이름이다. 성당의 이름 ‘테오토코스(Theotokos)’란 하느님을 뜻하는 ‘테오스’와 출산을 뜻하는 ‘토코스’가 합쳐진 ‘신성 출산’이라는 뜻의 용어로, 마리아가 신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를 출산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반해 마리아는 인성을 가진 예수를 출산한 것이라는 의미의 크리스토토코스라는 말도 있다. 이는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나 신성을 지닌 존재가 됐다는 사실을 함축하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낳을 수 있다.

이런 위험 때문에 431년 6월 7일 오순절,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성당의 십자가 아래에서 세 번째 공의회가 열렸다. 핵심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는 이성설(二性說)을 이단으로 배격하는 것이었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였다. 네스토리우스가 테오토코스라는 용어를 반대한 이유에는 이전까지 만연한 아르테미스 같은 여신 숭배와 성모 숭배를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공의회 결과 주교직에서 파면된 그는 435년 국외로 추방돼 사막을 전전하다가 가명으로 쓴 한 권의 자전적인 책을 남기고 451년 이집트에서 숨을 거뒀다. ‘오, 사막이여. 내가 죽은 뒤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날에 다시 부활할 때까지 나의 육신을 지켜줄 나의 어머니, 유배지여’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이 책은 추종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비밀리에 전해지다가 1910년 시리아본(本)이 발견돼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이 추종자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파라고 한다.

이단자가 된 네스토리우스파는 주류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동쪽으로 간다. 중국의 시안(西安)을 출발하기 전날인 지난 7월 16일, 우리는 그들이 동쪽으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숲을 이룰 정도로 많은 비석을 모아놓은 곳이라는 뜻의 ‘비림(碑林)’에서 ‘대진경교류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国碑)’라는 이름의 비석을 발견한 것이다. 32행 1764자의 글자가 적힌 비문은 대진사(大奏寺)의 승려 경정(景伊)이 짓고 여수암(呂秀嚴)이 쓴 것으로 돼 있다.

로마제국 아시아주 총독이자 애서가인 켈수스를 기념해 만든 켈수스 도서관. 건물 전면의 석조상들은 모조품이다.

사막·산맥·초원 가로지르는 문명의 힘
비문에 병기된 시리아어에 따르면, 경정의 본명은 아담으로 서아시아 출신의 사제였다. 비문은 “참되고 고요함 속에 항상 계시며, 태초가 있기 전에 시작도 없이 계시는 분. 신령과 공허 속에 오묘하게 계시며, 종말이 있은 뒤에도 신비스럽게 존재하시는 분”으로 시작해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이름이 왜 ‘경교(景敎)’인지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비문에 따르면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에 전래된 직후에는 파사교(波斯敎), 즉 페르시아교 혹은 메시아교(彌施訶)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당 현종 대에 이르러 경교라는 명칭으로 확정됐다. 한자어 ‘景’은 해를 뜻하는 ‘日’과 크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京’의 합성어이니 경교라는 말은 ‘커다란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라는 뜻이다. 경교라는 이름을 붙일 때 네스토리우스파는 딱히 자파만을 생각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체를 떠올렸겠지만, 이름이 확정된 뒤로 경교는 네스토리우스파를 뜻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정관(貞觀) 9년에 대진국(大秦國)에서 아라본이라는 고승이 찾아왔다고 비문에 적혀 있으니 중국에 경교가 전래된 건 635년의 일이 된다. 그로부터 3년 뒤인 638년 조칙으로 포교가 인정돼 장안 서시(西市) 북쪽 의녕방에 경교 사원인 파사사(波斯寺)가 건립됐고 이 절은 현종 때 대진사로 이름을 바꾼다.

경교는 당 무종 때인 840년 무렵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회창폐불(會昌廢佛)’이라 하여 강력한 불교 탄압 정책이 시작됐는데, 서역에서 전래된 경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도 함께 탄압을 받았다. 덕분에 당시 당에 유학 중이던 많은 신라 승려는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도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에서 돌아오는 귀국선에는 핍박을 피하는 불교도만 있었을까. 아니면 경교나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 신자도 있었을까. 이런 질문과 관련해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돌십자가 한 점, 마찬가지로 경주에서 발견된 철제 십자문 장식 두 점과 ‘성모 마리아상’ 등이 눈길을 끈다. 이 유물들이 정확하게 어디서, 어떻게 발견된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라 통일신라에 경교가 전래됐다고 확신하긴 어렵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말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기점인 경주에서 종점인 이스탄불까지 답사하면서 알게 된 건 원인과 결과, 수용과 재창조로 이어진 문명의 줄이 바로 실크로드라는 사실이다. 431년 에페수스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규정된 순간, 이 줄은 한 번 출렁거렸다. 이 출렁거림은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400여 년이 흐른 뒤에 동쪽 끝 신라에서 돌십자가로 한 번 출렁거렸다. 그 사이에 이 출렁거림이 어떻게 계속 이어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건 마치 요즘 우리가 동네 할인마트점에서 터키 맥주 ‘에페스’를 마시기는 하지만 그 맥주가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 동네까지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양조장이 옛 도시 에페수스와 가깝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에페스 맥주를 볼 때마다 이제 성모 마리아와 네스토리우스와 불국사의 돌십자가를, 그리고 사막과 산맥과 초원이 가로막아도 끝내 가로지르는 문명의 힘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꾿빠이, 이상』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소설을 출간했다. 이상문학상ㆍ동인문학상ㆍ황순원문학상ㆍ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한 중견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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