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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때 송병준은 『신에게 두 가지 대책이 있사옵니다만 도저히 청허 하시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무엇이고 말해보라.』
『이번 해아 밀사 사건은 폐하께서 잠깐 실수를 하신 것이 명백하므로 대가를 동경으로 납시어 일본 천황에게 진사를 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한문 앞에 장곡천 대장을 맞이하여 그에게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줄 아옵니다. 』라고 말하였다. 국왕은 홱 얼굴빛이 변해져서 이런 때에 늘 하는 버릇으로 두 손을 자꾸 비비며 송병준을 흘겨보시고 『아아 짐은 송병준의 인물됨을 잘못 보았구나. 짐이 좀더 일찌기 경을 중용 하였더라면 나라를 이런 위지에 몰아넣지는 않았을 것을….』이라고 침통하고도 의미 심장한 말씀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서시었다.
그리하여 고종 황제는 필경 양위를 하게되어 황태자 (순종)가 국왕이 되었는데 나중 일본의 총리 대신이 된 「하라」(원경)는 그 해 7월20일 일기에 『조선 국왕이 황태자에게 양위를 했다고 한다. 우리가 제의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 내각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사죄의 의미와 난국을 회피하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 같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일제의 상투수단으로, 사실은 그들이 협박 공갈로 양위를 시키고서도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한국 왕실과 내각에서 자발적으로 한 것처럼 말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등박문은 통감의 감독권을 확장하여 장래의 분규를 없애기 위해서 한국 정부 사이에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였다.
그것은 제l조에 「한국 정부는 시정을 개선함에 있어서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을 명기하고, 제2조에 「한국 정부의 법령의 제정과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먼저 통감의 승인을 얻어야할 것」을 확인하고, 제4조에 「한국 고급 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할 것」과, 제5조에는「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할 수가 있음」이라고 되어있어 완전히 한국의 내정과 외교는 모두 통감이 장악하는 바가 되었었다.
1907년 7월24일의 일인데 한국 정부에서는 많은 군대를 둘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겨우 근위병 수백 명을 남기고는 모두 해산하였다. 이등 통감은 이러한 것을 일제에 보고하기 위하여 8월에 귀국하고 9월에는 공작이 되어서 일본 화족의 최고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고종 황제가 양위를 하게된 결과로 영친왕이 큰 형님 순종 황제 앞으로 왕세자가 되고 곧 이어서 허울 좋은 인질로 일본으로 가게된 것인데, 새로 왕세자가 된 영친왕이 순종 황제를 모시고 있기 위하여 창덕궁으로 옮겨갈 때 고종 황제는 덕수궁에서 영친왕을 앞에 앉히시고 새삼스럽게 양위에 대한 전말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이제 창덕궁으로 가면 지금과 같이 아침저녁으로 만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작별하기 전에 한마디 말해 둘 것이 있다. 이완용 내각이 성립한 다음달 6월에 화난국 해아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게 되어 이 기회를 놓치고는 나라를 구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주로 공사 이범진과 연락해서 밀사를 보내게 된 것인데, 원수의 보호 조약 때문에 정식으로 참가를 하지 못하고 일본 대표의 반대로 아무 성과도 얻지를 못하였고 도리어 이등에게 강요되어서 양위를 하게 된 것이다. 일청·일로 전쟁이래 우리 나라는 점차 일본에 잠식되어 통감부가 설치된 뒤부터는 자주권을 잃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만 것이다.
창덕궁 (순종)은 육친으로는 형이 되지만 황위로는 부자 지간이니 서로 도와서 사직을 잘 지켜 나가도록 하라.』
영친왕은 어린 마음에도 아버님 고종의 말씀이 몹시 침통하게 들려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그저, 암담한 마음으로 있었는데, 바로 그 옆에서는 어머님되는 엄비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고 지밀 밖에서는 상궁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었다.
해아에 도착한 영친왕은 우선 지나간 날의 그러한 일들을 회상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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