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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의 전쟁③]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중앙일보

입력

1979년 2월 17일 자정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트남 국경 26개 지점을 통해 물밀듯이 침공해 들어갔다. 9개 군 보병 29개 사단 20만 병력, 항공기 170여 대, 탱크 200여 대를 몰고 침공한 중국군에 맞서 베트남은 민병대와 지역수비대 10만 병력으로 막아냈다.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중국의 대패권주의(大覇權主義)와 베트남의 소패권주의(小覇權主義)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신경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군 10만 이상의 병력과 다수의 탱크부대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장악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자신의 패권을 저지하려는 눈 밑의 가시 캄보디아에 ‘가르침’을 주고자 했다. 당시 프놈펜에는 중국의 군사고문 6000명이 주둔하며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하노이는 소련과 맺은 우호조약과 중국 북쪽 국경지역의 소련군 증강이 중국의 개입을 저지할 것으로 판단했다.

하노이의 판단은 틀렸다. 1975년 미군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한 베트남은 120만 화교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그뿐 아니라 국경 일대에서 78년 하반기에만 700차례에 걸쳐 무장 충돌을 일으켜 300여 명의 사상자를 초래했다. 베트남 측은 1978년 중국의 베트남 영토 침입에 따른 충돌이 2175건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일찌감치 ‘오만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베트남에 대한 ‘징벌’을 고려했다. 78년 9월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베트남 침공 문제가 직접 언급됐다. 정치국 회의에 앞서 덩샤오핑이 베트남 침공을 이미 결정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이다. 덩은 11월 초 9일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베트남 침공 시 이들이 중국에 대해 가질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리콴유 싱가포르 수상을 만난 자리에서 덩은 베트남을 ‘왕바단(王八蛋, ‘쌍놈의 자식’이란 중국 욕설)’이라고 불렀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하면 중국은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며, 소련은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미국이 꺼림칙했다. 78년 12월 4일 때마침 미국 카터 행정부가 국교정상화를 제안했다. 덩샤오핑은 8일 만에 전격적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79년 1월 1일 미·중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덩샤오핑은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서둘러 미국을 방문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베트남을 소련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고, 미국을 활용해 베트남과 소련의 군사협력을 막기 위해서였다. 덩샤오핑은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작은 친구가 말을 안 들으면, 엉덩이를 때려야 한다(小朋友不聽話 該打打?股了)”라고 말했다. 귀국길에 덩샤오핑은 일본에도 들렀다.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수상을 만나 워싱턴에서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징벌’의 정당성을 천명했다. 침공 준비는 끝났다.

2월 11일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D데이를 17일로 결정했다. 4월에 시작되는 우기를 피하기 위한 택일이었다. 서기 938년 당(唐) 멸망 후 5대10국에 속한 남한(南漢)이 베트남에 패함으로써 1000년 만에 베트남이 독립할 수 있었던 이유가 우기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전쟁이었음이 고려됐다. 북쪽에서 만일 소련이 결빙된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을 건너더라도 곧 해빙되어 더 이상의 작전 전개가 어려울 것임도 택일에 영향을 끼쳤다.

◇상처뿐인 후발제인(後發制人)

인민해방군이 베트남 국경을 넘던 17일 국영통신사인 신화사는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말을 인용했다. 중국은 전운(戰雲)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늦게 출발해 상대를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 전략이다. 미국이 9·11 테러 이래 ‘예방 전쟁(preventive war)’이라는 명목으로 선제공격을 불사하는 것과 대조된다.

중국은 베트남 침공 일격에 실패했다. 25년간 전투를 통해 단련된 베트남 지역수비대와 민병대의 노련함 때문이다. 미군이 남기고 간 50억 달러어치의 최신 전쟁물자와 무기도 위협적이었다. 민병대는 베트남 북부 특유의 복잡한 터널과 엄폐호, 산간지형을 십분 활용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전경험이 없고 장비가 낡은 중국군에 베트남은 악몽이었다.

1954년 사상 최초로 식민지 군대가 제국주의 군대를 격파했던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를 지휘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보 응우옌 지압(武元甲, Vo Nguyen Giap, 1911~) 장군이 베트남군을 지휘했다. 그는 정규군 대신 예비군 10만 병력을 동원, 지형을 이용해 중국군을 방어하는 전략을 택했다. 최정예 병력 5만은 정규전이나 장기전으로 확전될 경우를 대비해 하노이에서 대기하는 배수진을 쳤다.

개전 초 중국군 사상자가 속출했다. 중국은 사령관을 쉬스유(許世友)에서 양더즈(楊得志)로 교체했다. 암묵적으로 실패를 인정한 조치다. 새 사령관은 포병과 기갑부대를 앞세웠다. 보병의 진격 속도를 늦췄다. 라이쩌우, 라오까이, 하장, 까오방까지 국경을 맞댄 4개 지역 중심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도시 랑썬은 격렬한 포격 뒤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3월 5일 오후에야 장악에 성공했다. 불과 몇 시간 뒤 베이징 정부는 다시 신화사를 통해 “자위반격전이 예상 목적을 달성했다”며 부대가 철수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철수는 16일 완료됐다. 19일 베트남 국방부는 전투가 자기네 승리로 끝났다고 발표했다.

◇단기적 실패, 장기적 성공

전쟁은 참담했다. 17일간의 전투에서 중국군 2만6000명과 베트남군 3만 명이 사망했고, 중국 3만7000명, 베트남 3만2000명이 부상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중국이 전쟁을 주도했던 만큼 사상자 숫자는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베트남은 중국이 군사상 손실로 급거 후퇴했으며, 자신들은 중국이 떠나기 쉽게 레드 카펫을 깔아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종전 직후 서방은 “중국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베트남이 성공한 전쟁이었다”라고 평가했다. 90년대 들어서는 중국이 베트남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는 데는 실패했지만 장기적 소모전이라는 전략에서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또 하나, 베트남에 소련의 비(非)개입이 아쉬웠다. 전쟁은 소련이 믿을 만한 우방이 아님을 증명했다. 강대국에 의존할 바가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그럼에도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베트남은 1991년 붕괴까지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종전 후 34년이 흘렀다. 중국·베트남 양국은 ‘좋은 이웃, 좋은 친구, 좋은 동지, 좋은 동반자(好隣居好朋友 好同志 好?伴)’ 관계를 회복했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 중심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에서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대신 당시 폐허로 변했던 랑썬과 중국 광시(廣西)성 핑샹(憑祥)을 잇는 유이관(友誼關)에는 하루 수천 명의 보따리상이 왕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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