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천재, 그 만들어진 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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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단골 추천서로 오르내리는 로망 롤랑의 명저 '베토벤의 생애'는 이렇게 인상 깊은 구절로 시작한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신선한 대기가 흘러들게 하자. 영웅의 숨결을 들이마시자. 영웅들의 종족을 부활시키자."

장려한 문체에 담긴 '롤랑의 베토벤'은 과연 영웅이 따로 없고, 천재의 모습 그대로 그려진다. 하지만 1927년 출간된 이 전기는 보불전쟁 패전국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살펴야 앞뒤 맥락이 제대로 파악된다.

즉 롤랑은 프랑스 사회의 회의주의.패배주의를 잠재울 의도로 영웅 베토벤의 상(像)을 '창조'한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훗날 19세기 낭만주의의 단골개념인 천재 혹은 영감(靈感)이라는 틀에 무리한 대입을 시도했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허나 롤랑만이 그랬을까? 대부분의 평전.전기류가 해당 인물을 부풀려 묘사한다. 특히 예술가 전기들은 천재론으로 분칠되게 마련이다. 한데 최근 이 통념을 뒤집는 신간들이 국내 독서시장에 새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해 마이클 피츠제럴드의 '피카소 만들기'(다빈치)가 그랬고, 도널드 새순의 신간 '모나리자'(해냄) 역시 그렇다.

불세출의 천재 화가 대신 비즈니스맨 뺨치는 피카소의 뒷모습을 보여주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명성 자체가 예술사적 우연의 결과일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오해하지 말자. 작가적 천재성(피카소) 혹은 서양미술 최고의 걸작(모나리자)임은 인정하되, 그와 별도로 어두컴컴한 인간적 약점이나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없지 않다는 식의 엉거주춤한 접근이 결코 아니다.

두 책은 예술사 속의 통설 혹은 진리라는 것 자체가 '만들어진 신화'일 수 있다는 도발적 주장 쪽이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두 책 모두 정평을 얻은 저술들이라서 독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는데, 이판에 천재 화가들로 채워진 미술사 전체에 대한 확인사살을 감행한 저술이 나왔다.

송상용 교수의 '천재는 죽었다'(아트북스)가 문제의 책인데, 이책은 예술사에 숨어있는 천재.천재론 자체가 가짜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왜 이런 책들이 속속 등장할까. 그것은 우리 시대가 별난 시대라서 그렇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철학자 미셸 푸코의 영향이다.

서구 지성사 자체가 유일한 진리이고 정당한가를 물었던 푸코의 영향력은 기존 예술사.지성사의 정당성, 그리고 그것이 가진 권력적 속성, 즉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 것이다.

푸코는 이렇게 물었다. "예술사는 한 줌도 안되는 인물들에 영광을 부여하고, 나머지 예술가들은 내동댕이친 '권력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이 포스트 모던한 시대는 우상파괴의 시대이거나 허무주의의 시대가 아니다. 외려 그 반대다. 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앞선 시대의 빛과 그늘을 함께 볼 수 있는 기막힌 시대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지성계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서구 모더니티에 주눅들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과연 어떻게'는 별도의 문제이니 다음에 따로 이야기할 일이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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