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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갑(甲)인 여성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결혼 7년차 30대 후반 직장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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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30대 후반 직장인입니다. 결혼 7년차에 5살 난 아들이 있습니다. 제 고민은 집이나 직장에서 모두 을(乙)이 돼버린 제 처지입니다. 연애 시절 상냥하고 여성스러웠던 아내는 아들 출산 후 정말 무서운 갑(甲)으로 돌변했습니다. 술 먹지 마라, 취미 생활에 너무 돈 쓰지 말라며 말끝마다 돈돈돈 하니 내가 돈 버는 기계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성 팀원이 많은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료·후배는 물론 상사까지 여성입니다. 옆 팀의 남자 동료는 여자 많아 좋겠다는데 속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세세한 것까지 지적하며 몰아붙일 때는 너무 힘듭니다. 여자들끼리 어디론가 나가면 ‘나만 왕따시키나’ 싶어 속상하기도 합니다. 양성평등을 주장하던 사람의 한강 투신 사건까지 접하니 더더욱 을이 된 제 남성성의 평등을 주장하고 싶네요. 을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도 잘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최근까지 남자가 분명히 갑이었습니다. 경제적 책임을 지는 대가로 절대적 권위를 가질 수 있었죠. 그러나 영원한 갑은 없습니다. 요즘 남편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자신이 을이라 답합니다. 그런데 아내들도 스스로를 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을만 넘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남성이 갑인 시스템에 대한 여성의 저항입니다. 여자가 약하니 남자가 보호해줘야 한다는 기존의 논리에, 여자는 약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여자는 수동적이고 약하기 때문에 남자가 권위를 갖고 능동적으로 사회를 이끌며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담론은 남자가 갑의 지위를 놓지 않으려고 만든 콘텐트라는 것이죠.

사람의 행동과 생각은 환경의 지배를 크게 받습니다. 친절한 회사에서 친절한 직원이었던 사람이 불친절한 회사로 가면 며칠 만에 불친절한 직원이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흔하고요. 우리는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하는 독립적인 객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거대한 시스템이 배정해주는 역할을 부지불식간에 내면에 심고 그게 내 결정인 양 그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MUS(Medically unexplained symptoms)란 용어가 있습니다. 환자가 증상을 호소해서 검사해봐도 명확한 이유가 나오지 않을 때 쓰는 용어로,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증상이란 뜻입니다. 병원 방문자 5명 중 1명은 MUS 환자입니다. 증상이 있는데 병명이 안 나오니 답답합니다. 명의를 찾아다니며 의료비 지출은 점점 늘지만 답이 나오지 않으니 병 고치려다 화병이 더 깊어집니다.

MUS 과반수가 정서적 문제에 기인합니다. 화병이란 얘기죠. 과거엔 화병의 전형적인 캐릭터는 엄한 시집살이를 하는 며느리였습니다. 인내와 희생을 최우선으로 둬야 하다 보니 마음에 울화가 쌓여 마음의 병이 생겼습니다. 나를 위한 욕구가 숨을 쉬지 못하니 욕망의 좌절인 분노가 생겨나고, 그것마저 마음껏 표현할 수 없기에 그 분노가 몸의 증상으로 나타난 겁니다. 화병은 우울불안장애가 몸으로 드러난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큰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어 병원을 찾아 검사를 해보지만 결과는 대부분 정상입니다. 그저 정서적 문제가 몸의 증상으로 나타난 거니까요.

 며느리의 대표상품이던 화병이 최근 들어 남자에게 흔하게 나타납니다. 요즘 젊은 며느리 가운데엔 시어머니에게 할 말 다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직접 대놓고 못하더라도 다른 가족이나 친구에게 속상한 이야기를 잘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속 이야기를 잘 못합니다. 말을 못하니 위로받을 수 없고, 분노와 슬픔이 쌓여 정서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내 약점을 드러내 보이는 용기가 있어야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약하면 곧 지는 것이란 강박이 마음 깊이 새겨져 있어서입니다. 위로받고 싶은데 약해질 순 없으니, 그 갈등에 괴로움만 쌓여갑니다.

 화병의 신체적 증상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머리 아프고, 심장 답답하고, 입맛 없고, 소화 안 되고, 관절은 쑤십니다. 심지어 감기 증상처럼 오기도 합니다.

 몸의 문제냐, 마음의 문제냐는 구별이 의미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은 한 세트로 움직입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에 문제가 생기고, 마음이 힘들어도 몸에 문제가 생깁니다. 마음이 힘들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 분비돼 몸의 균형을 망가뜨립니다. 또 과도한 스트레스는 뇌를 지치게 하고, 지친 뇌는 예민해져 통증을 더 잘 느낍니다. 조금 아팠던 부위가 더 아프게 느껴져 삶의 정상적 기능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역사를 보면 갑·을 지위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화병을 조절해 왔습니다. 갑을 관계가 없는 유토피아는 쉽지 않습니다. 욕망이라는 엔진이 모두에게 장착되어 있어 다들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니 사회경제적 자원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센 쪽이 더 많은 자원을 가져가면 그렇지 못한 쪽은 심리적 결핍을 느낍니다. 그것이 쌓이면 화병이 됩니다. 살기 위해서는 을이라는 포지션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합니다.

 사실 갑도 피곤합니다. 권위만큼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능력 있는 연상녀를 찾는 남자가 어찌 보면 현실적이고 똑똑한 건지도 모릅니다. 피곤하기만 한 권위를 던져버리고 성숙한 여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경제적 여유를 공유하겠다는 선택이니까요. 여자도 자신에게 잘 맞춰주고 싫은 소리 한번 안 하는 연하남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남편에게 쥐여 사는 친구를 볼 때면 우월감도 느껴져 기분이 더 좋아집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진지하게 얘기했습니다. 지금 이런 소리 하면 몰매 맞습니다. 그 당시 여성과 지금의 여성이 달라진 것일까요. 유전적·생물학적으로 더 강하게 진화한 걸까요. 아닙니다. 생물학적 특징이 바뀐 게 아니라 역할이 바뀐 겁니다. 모성애로 자기 희생을 지속해 오던 여성이 이제 좀 숨을 쉬어야 할 때가 온 겁니다. 반대로 강해야만 했던 남자는 이제 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위로받는 힐링 시스템을 다시 활성화할 때입니다. 역할 교대는 시스템이 만드는 화병을 치료하는 인류 역사에 깃든 현명한 프로그램입니다.

 당분간 탈권위라는 베이스에 촉촉한 감성적 자유를 믹스한 칵테일이 유행하리라 예상합니다. 같이 한잔 하시죠.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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