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정당공천 폐지 공약 꼭 지켜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공자는 나라를 경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식량과 병력, 신뢰를 꼽았다. 그중에서도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국민의 신뢰를 얻으면 식량이나 병력이 부족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식량과 병력이 풍부해도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기초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을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공약은 국민에게 제시한 정당의 정책이고 당론이다. 그럼에도 지방선거를 1년도 남겨 놓지 않은 지금 시점에 민주당은 당원투표를 통해 정당공천 폐지를 당론으로 결정했고, 새누리당은 당론을 새롭게 결정해야 한다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은 설령 야당이 반대하더라도 설득을 통해 공약을 실천하는 의지와 역량을 보여야 한다. 야당인 민주당이 우여곡절을 거쳐 공약인 정당공천 폐지를 이행하는 결정을 했음에도 여당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공약인 정당공천 폐지를 망설이고, 이를 새로 검토하겠다는 것은 책임 있는 여당으로서 신뢰를 받기 어렵다.

 물론 정당공천 폐지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적지 않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이에 새누리당은 정당공천 폐지 여부를 새삼스럽게 논의할 것이 아니라 당론으로 공약한 공천 폐지를 실천하는 것을 전제로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이를 선거법에 반영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당공천 폐지로 나타나는 여성의 대표성 약화, 후보 난립, 후보 변별력 약화 등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동안 20년 넘게 논쟁을 거쳐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여성명부제나 남녀동반선출제, 기호제도 폐지, 광역선거와 기초선거의 분리 등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새삼스럽게 당론을 결정하겠다는 것은 공약을 번복하려는 꼼수로 비칠 수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국회의원이 비공개를 전제로 개인적으로는 정당공천을 폐지하고 싶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정당공천을 통한 정치자금 조달과 지방정치인을 수족으로 부리는 기득권을 놓기 싫기 때문이다. 정당공천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돼도 통과 여부는 불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0% 이상이 요구하는 정당공천 폐지를 국회의원들이 개인적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대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로서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 국정에 반영해야 한다. 만약 국민의 절대다수가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의견을 낸다면 그 국회의원은 더 이상 ‘국민대표’가 아니고 자신의 이익을 대표하는 ‘개인대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의 대표로서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하겠다는 약속과 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정당공천으로 인해 부패정치의 뿌리가 깊어지고 지방선거가 전국선거로 변질돼 중앙정치권의 싸움판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왔다. 주민의 구체적인 생활문제는 뒷전이 되고 공허한 이념논쟁이 난무하고 있다. 지방정치는 중앙정치에 예속되어 지방자치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정당공천을 통해 지역구 관리와 지방 경영에 몰두하다 보니 정작 본업인 전국적인 현안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회의원들은 부당한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의 대표자로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대선 공약인 정당공천 폐지를 조속히 법제화해 지방정치도 살리고 중앙정치도 살리는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실종된 정치권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