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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고 추진도 '교육오년지소계' 전철 밟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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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명박정부 핵심 교육정책인 자율형사립고에 대해 박근혜정부가 전면 수정을 선언했다. “평준화 교육에 수월성을 보완하겠다”(이명박 전 대통령)며 추진됐던 정책이지만 새 정부는 “일반고와 중학교 교육을 어렵게 한다”(서남수 교육부 장관)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렸다. 첫 졸업생을 배출하자마자 존폐 기로에 선 자사고를 통해 유난히 부침이 심한 한국 교육정책의 ‘잔혹사’를 들여다봤다.


지난 13일 저녁 서울 강서구에 사는 김모(여·43) 씨 부부는 ‘자율형사립고가 사실상 폐지된다’는 뉴스에 깜짝 놀랐다. 첫째(고1)를 자사고에 보낸 이들은 중2인 둘째도 같은 학교에 보낼 생각이었다. 김씨는 “‘일반고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라며 정부가 홍보할 때는 언제고 대통령 바뀌자마자 학교 없앤다는 건 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자사고학부모연합회 김경원 회장은 “불과 몇 년 만에 학교를 없애는 교육정책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이냐”며 “정권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는 통에 학부모들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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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준비 고려 않고 목표만 집착해 부실

 학교의 당혹스러움은 더하다. 2010년 자사고로 전환한 서울 우신고 김갑중 교장은 “차별화된 교육을 위해 지난 4년간 많은 투자를 했는데 이제 학교 존폐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며 “정부가 자사고 전환을 권유하다 이제 와서 일반고 위기의 ‘원흉’이라며 없애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한국교총은 18일 성명을 내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큰 문제”라며 “자사고 선발권 폐지는 일반고 개선 방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자사고 정책은 2007년 10월 이명박 대선 후보의 ‘고교다양화 300 프로젝트’ 공약에서 비롯됐다. 학생·학부모 요구에 맞는 특성화·다양화된 교육을 위해 전국에 자사고 100개, 기숙형 공립고 150개, 마이스터고 50개를 만들겠다는 거였다. 전체 고교의 7분의 1에 해당한다.

 이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주역은 이주호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다. 이 후보 캠프에서 교육 분야를 맡았던 그는 당선 이후 대통령직인수위 간사,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 교과부 차관·장관을 역임하면서 교육 정책을 이끌었다. 그는 이 후보 당선 직후 본지와 인터뷰에서 “자사고 정책으로 학비가 싸면서도 창의적 수업을 하는 학교들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정부의 ‘대표 교육상품’인 자사고는 그러나 신청·지정 단계부터 삐거덕거렸다. 자사고에 관심 있는 사학들은 학생선발권을 원했다. 하지만 정권 출범 후 ‘귀족학교’라는 반발이 거세지자 선발권을 주는 데 소극적이었다. “사학들은 우수 학생을 뽑는 선발권을 원했지만 정부는 허용할 수 없었다.”(성삼제 당시 교과부 학교제도기획과장, 현 교육부 기획조정실장) 정부·사학의 ‘동상이몽’은 결국 ‘성적 제한 있는 선지원 후추첨(서울은 중학교 내신 성적 50% 이상)’이라는 애매한 타협으로 끝났다. 그 결과 서울 인창고 등 3개교가 자사고 신청을 철회했다.

 ‘임기 내 100곳 지정’이라는 목표에만 몰두해 자사고의 지역편중을 부르고 학교의 준비 상황 등을 제대로 따지지 못했던 것도 문제였다. 전국 자사고의 절반가량이 서울(2013년 현재 49곳 중 24개)에 몰렸다. 2010년 12월 첫 신입생 모집 결과 서울 자사고 중 12개교의 정원이 미달됐다. 이명박정부 교육과학문화수석(2008~2009년)이었던 한양대 정진곤 교수는 “ 100개라는 숫자에 집착해 너무 급히, 많이 만든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부 자사고들은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마련하지 못했고 학업성취도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반면 ‘자사고가 일반고를 황폐화시킨다’는 비판 여론은 높아졌다. 2009~2011년 서울 수락고 교장이었던 김영윤 교육부 학교정책관은 “자사고가 대거 등장하면서 일반고 신입생 중 중하위권 학생(중학교 내신 4등급 미만) 비율이 48%에서 2년 새 68%로 늘었다”고 주장했다.

정권 초마다 입시정책 흔들려 혼란 가중

 자사고에 대한 교육당국의 인식 변화는 서남수 장관이 취임하면서부터였다. 노무현정부 마지막 교육부 차관이었던 서 장관은 이명박정부의 고교 교육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토론회 등에서 “고교 다양화 정책은 수직적 다양화, 서열화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2011년 8월), “시장주의를 무차별적으로 교육에 도입해 경쟁과 입시 위주 교육을 심화시켰다”(2011년 12월)고 주장했다.

 교육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교사 출신(교육전문직)이 많은 교육정책실(실무부서) 간부들은 “자사고의 우수 학생 독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일반고 문제도 못 푼다”고 주장했다. 반면 몇몇 일반 관료들은 정책의 연속성과 수월성 교육 등을 들어 반대 논리를 폈다고 한다. 급물살을 탄 것은 이달 초 서 장관이 청와대에 자사고 선발권 제한을 포함한 일반고 육성 방안을 보고해 박근혜 대통령의 승인을 받으면서부터다.

 당초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자사고는 설립 목적에 맞게 관리를 강화하면 된다”며 “수월성·평등성을 함께 추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사학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인데도 대통령이 자사고 개편안을 선뜻 받아들여 놀랐다”고 전했다. 한양대 정 교수는 “4년 만에 없던 일로 되돌리는 것보다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게 국가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지난 정부의 핵심 교육정책이었던 자사고는 결국 ‘불충분한 의견 수렴→반발 설득 실패→졸속 추진→정책 부실→철회’ 과정을 밟으면서 막을 내리게 됐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교육정책은 자사고만이 아니다. 대표적 예가 대입 논술 가이드라인이다. 2005년 노무현정부는 영어지문 출제, 암기 지식을 묻는 문제 등을 본고사형 문제로 정의하고 이를 금지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2009년 이명박정부는 ‘대학 자율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하지만 대학들의 본고사식 논술 출제가 재발하자 지난해 8월, 교과부는 영어지문, 교과서 과정을 벗어나는 수학 문제 출제 등을 금지했다. 사실상 논술 가이드라인이 부활한 셈이었다.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확대하기 위해 도입된 집중이수제, 학교폭력 대책의 일환으로 나왔던 복수담임제 등도 시행 1~2년 만에 사실상 폐기됐다. 지난 정부에서 수능 영어시험을 대체하겠다며 393억원을 투입해 개발한 국가영어능력평가(NEAT)도 수능 대체 여부가 불확실한 상태다.

 부침이 가장 심했던 것은 입시 정책이다. 정권 초마다 입시정책이 흔들렸고 혼란은 수험생과 학부모 몫이었다. 1980년 신군부는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뼈대인 입시 정책을 폐지하고 교과목 위주의 시험인 학력고사로 개편했다. 12년 동안 유지되던 학력고사는 문민정부 들어 ‘사고력’을 중시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대체됐다. 올해 21년째를 맞은 수능도 응시 과목이나 전형 방식, 난이도 등이 거의 매해 바뀌고 있다. 1993년 처음 치러진 수능은 두 차례 실시했다 난이도 조절 실패로 시행 1년 만에 한 차례로 줄었다.

잘못된 정책에 반대 못하는 관료도 큰 문제

 2007년 수능은 등급제를 도입해 성적표에 1~9등급만 표기토록 했지만 2008년 이명박정부 출범 직후 바로 폐지됐다. 2011년엔 ‘쉬운 수능’을 위해 영역별 만점자를 1%가 되게 하겠다고 밝혔지만, 올해 수능부터는 이 같은 방침을 폐지했다. 올해 수능은 난이도에 따라 A·B형으로 나뉘어 치러진다. 하지만 교육부는 내년 이후 A·B형 분리 출제 방침을 재검토 중이다.

 중앙대 강태중(교육학) 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지나친 ‘개혁주의’가 교육의 일관성을 해치고 있다”며 “잘못된 정책 방향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교육관료들의 무책임도 오락가락 정책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숙명여대 송기창(교육학) 교수는 “교육 문제만큼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큰 방향을 설정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인성·윤석만·이한길 기자

◆교육오년지소계(敎育五年之小計)=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뒤바뀌는 현상을 빗대 교육계에서 쓰는 말. 교육은 ‘100년을 내다보고 세워야 할 큰 계획(百年之大計)’인데도 손바닥 뒤엎듯 정책이 자주 바뀌어 학생·학부모만 피해를 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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