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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왕도의 상징 도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경복궁과 더불어 왕도의 상징이었던 거대한 유적「서울의 도성」은 헐리고 잘리어 상처투성이가 되고 있다.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하면서 전국의 장정들을 동원, 국력을 기울여 쌓은 이 도성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국방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등 외침때 단 한번도 본래의 목적에 이용하지 못하고 매번 이 도성은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
5백76년전인 태조5년(1396년)에 착수 완공된 성의 길이는 16.9km.
북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등 서울의 4대산을 능선과 능선으로 연결, 타원형으로 쌓은 성은 원래는 석성이 3분의1, 토성이 3분의2. 산의 능선은 돌로 쌓았고 평지는 흙으로 쌓았었다.
태조는 즉위 4년째 정도전을 시켜 측량을 한다음 이듬해 강원·경상·전라·평안·함경등 5도의 장정 11만8천70명을 동원, 1월9일에 착공하여 2월28일까지 49일간에 성을 쌓았다.
그당시 순전히 인력에 의한 축성이었는데도 49일만에 성을 쌍은 것은 기적적인 공사「템포」.
그때 서울인구가 10만명이 채 못되었는데 서울인구보다 많은 장정을 동원했기 때문에 묵을 집이 없었던 것은 뻔한 일.
판교원이란「널다리 판잣집」을 지어 수용했다. 농번기를 피한다고 추운 겨울날을 택했고 무리한 공사를 강행했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았다.
태조실록에는 단지 희생자들을 위해 수육재를 세번이나 지냈다는 것과 장정들이 귀향한 후 폐질·병사자가 더욱 늘어나 희생자 가족에게는 3년간 면세조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전라지방에는 희생자가 너무 많아 곡식을 많이 나누어 주어 위로했다고 적혀 있을 뿐 희생자의 숫자는 적혀 있지 않다. 또 이때 도망치는 자가 많아 초범은 볼기백대를 때렸고 누범자는 목을 잘랐다고 한다.
이때 공사운영방법은 북악의 동쪽을 기점으로 6백척씩 97개공구로 나누었다. 공구는 천자문의 글씨순으로 천자구로 시작, 북악의 서편 적자구로 끝났는데 각구는 지방별로 떠 맡겨 경쟁과 책임한계를 매겼다. 지금도 반공「센터」근처의 성에 곤자육백척 밀양시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때 석성의 높이는 4.3m. 토성의 밑너비는 6.8m. 윗 너비는 5.1m, 높이는 7m정도. 석성은 밑에는 큰 돌을 쌓고 위에는 작은 돌을 적당히 올려놓았다. 돌을 다듬지 않고 괴어놓은 정도여서 축성기술로서는 조잡, 완공자체가 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춘기l차 공사라고 하는데 이때 미처 성문은 못 만들었고 군데군데 덜 쌓은 곳이 많았다.
다시 같은해 8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강원 경상, 전라등 3도 장정 7만9천4백명을 동원, 나머지 부분을 완성했다.
이때 4대문과 4소문이 만들어졌다. 청계천이 빠지는 동대문 근처등 물길을 위해「아치」형 운제를 만들고 그 위에 석성을 쌓았다. 이 공사중 특히 늪지대인 동대문근처의 공사가 제일 어려웠다.
이곳은 성산(성주) 장정들의 책임구역이었는데 모두 공사가 끝난후 까지도 20일이상 땀을 흘렸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서둘러 축성한 다음 밤 9시에 인정종을 쳐 대문을 닫았고 통행을 금지했으며 새벽 4시에 파누종을 쳐 대문을 열었다. 담을 뛰어 넘는자는 볼기 1백대의 처벌을 하도록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남대문과 서대문사이의 성이 뛰어 넘기에 알맞아 비오는 날은 성벽에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한다. 그러나 겨울에 급히 서두른 날치기 공사여서 10년이 못가 도처에서 성이 기울어지고 무너졌다.
태종은 재공사를 계획했으나 국력이 모자라 포기, 완공 25년째인 세종3년(1422년)에 재공사가 시작됐다.
이해 1윌15일 전국 8도에서 이조 역사상 최고기록인 32만2천4백명의 장정을 동원, 토성을 모두 헐고 석성으로 쌓고 석성도 개수, 38일만에 끝냈다.
세종실록에는 공사현장에서 동사 또는 병사한 자가 8백72명으로 기록돼 있다. 그후 숙종때 또 한번 큰 보수공사를 했고 작은 보수공사는 때때로 있었다.
숙종때의 공사는 돌을 다듬어서 제대로 쌓았다.
어쨌든 인구가 축성당시보다 50여배로 늘고 서울의 넓이도 수십배로 커지면서 옛 서울의 도성은 시내 중심부에 끼여 그 설곳을 잃어가고 있다.
1910년대부터 헐려나간 성은 오늘날 북악산 능선에 초기의 제 모습이 조금 남아있고 인왕산 낙산위까지 도시의 근대화와 인구의 밀집으로 도성의 모습은 사라져 가고 있다. <손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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