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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가장 길었던 3일(14)|「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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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월25일 아침부터 28일 새벽 2시반에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까지 서울시경 산하의 5천여 경관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당시의 몇 시경찰관들의 증언을 통해 다시 알아보자.
▲이계무씨(당시 시경보안과장·현 소사서 복천암농장경영·54).
『나는 늘 나가는 교회에서 예배를 보다가 시경에서 급보를 받고 사변이 난 것을 알았어요. 지금은 경비과가 분리돼 있지만, 그때에는 보안과에 경비계가 소속돼 있어 내가 경찰경비병력을 동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지요.
대충 비상경찰 경비력 동원계획을 짜서 명령을 시달하느라고 정말 바빴습니다.

<경찰병력, 창동전선에 배치>
25일 하오 4시쯤에 동원된 경찰병력을「드리쿼터」로 실어 창동과 태능의 두 방면에 배치했습니다. 장비라고는「카빈」과 경기관총 몇자루 밖에는 없었어요. 차량도 「드리쿼터」와 트럭정도였구요. 하지만 경찰은 사기가 좋았습니다. 일요일인데도 비상에 못나온 경관은 없었으니까요. 하루에 두 교체로 시내 경비병력을 일선에, 일선병력을 시내로 교대시켰는데 경찰의 이동과 전투는 주로 군의정보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었지요.
26일 하오에 창동과 태능전방에서 적과 경찰이 경미한 교전을 했는데 전과는 별로 없었어요. 이때 일로 인상 깊었던 것은 27일 밤 11시30분쯤 평소 친분이 두터운 조병옥박사가 격려차 내방에 들러「군대가 서울을 사수한다니 안심하고 돈암동 집에가서 쉴까하네」하고 돌아갔어요. 그후에 사태가 급변하여 28일 새벽 1시에 간부회의를 열고, 시경도 서울에서 후퇴하기로 결정하고 2시부터 철수를 시작했지요. 내가 한강인도교를 건넌 것은 폭파 직전이었습니다.』
▲손유성씨(당시 종로경찰서 경리주임·현 계림극장 상무·49).
『24일 밤에 숙직이었는데 아침에 강원도경에서 비상경비 전화가 왔어요. 상경한 윤명운 국장에게 38선에 이상이 생긴 것을 연락해 달래요.

<동료서원에 연락없이 후퇴>
27일 하오에 종로서 경비주임 이수방경위(현 강원도 속초경찰서장·51) 가「성북서 건너편에서 포를 막 쏘고 있는데 어떻게 계속해서 포격을 하는지 포신이 뻘겋게 달아 군인이 물을 갖다 부으면서 쏘고 있더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펄쩍 들더군요. 그래서 비상지출품과 식량을 서「트럭」에 실어 놓고 대기하다가 하도 졸음이 와서 창고안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였어요. 깨어보니, 채영식 서장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연락도 없이 후퇴한 동료들이 원망스럽더군요. 용산서로 가라고 해서 가보니 아무도 없어 다시 삼각지로 걸어가다가 한강교 폭파를 목격했지요. 그전날 하오에 정일형의원을 길에서 만나 전황을 묻기에 빨리 피난가라고 권해서 지금도 가끔 그때 참 고마왔다는 전화를 받지요.
▲김홍도씨(당시 시경경비계 주임·현 노량진경찰서장·47).
『나는 그날밤 시경 경비계 당직 주임이었는데 새벽 5시쯤에 김태선 국장이 전 경찰에 긴급 비상을 걸라는 전화명령이 왔어요. 소집되는 대로 경감급을 대대장으로 경찰전투부대를 3개대대 편성했습니다. 1개대대는 3백50명정도였지요.

<채병덕장군 "후퇴 말라">
이 부대를 의정부 태능쪽에 투입했지만 적의 압도적 화력앞에 분산 후퇴했어요. 27일 저녁 7시쯤에 사태가 긴박해져 경찰도 일단 후퇴명령을 내렸다가 미군 참전소식에 김 국장이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이때 채병덕장군이 중앙청 쪽으로 지프를 타고 달리면서 후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젓고 갔습니다. 그러나 새벽 1시쯤 경비계장 김병두경감과 함께 졸고 있는데 남산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려오고 사무실에는 경찰간부도 별로 없었어요.
나는 「드리쿼터」를 타고 김병두경감은 지프로 한강으로 달렸지요. 내 바로 앞에 김태선 국장의 차가 있었는데 한 육군대위가 강을 못건너게 막아요.「국장차인데 왜 통과시키지 않느냐」고 항의하여 겨우 다리를 건넜습니다. 막 건너온 순간「쾅」소리와 함께 내가 탄「드리쿼터」의 뒷부분이 공중에 떴고, 소방과장 신인우총경이 탄 지프유리창이 박살이 났지오. 또한 이때 종로경찰서원들이 타고 건넌 트럭이 하늘로 붕뜨면서 짐짝처럼 경찰관들이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구요.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홍병식씨(당시 시경경무과장·현 유실물센터 대표·66).
『나는 다른 이야기는 그만하고 시경이 후퇴할 때 겪은 일을 몇마디 하겠어요.

<김국장, 다리폭파전 도강>
28일 새벽 2시쯤 최병용 성북서장이 헐레벌떡 시경으로 오더니「뭣들 하고 있소? 벌써 적 탱크가 종로에 나타났는데」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후퇴를 서둘렀지요. 김태선국장이 앞장서고 최운하 부국장이 그 다음에,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처음에는 별로 사이가 떨어지지 않았는데 인파와 거파에 밀려 서로 흩어졌어요. 내차가 겨우 용산역쯤 다다랐을 때 번쩍하는 불꽃과 함께 큰 폭음을 들었어요. 다리가 끊어진 거지요. 이때 김태선국장차는 간신히 다리를 넘은 모양인데 뒤따르던 최운하 부국장차는 안보이더군요. 그후 최부국장 소식은 영영 듣지 못했는데 다리 폭파때 희생이 된 것 같습니다.
5천 시경 직원들은 끝까지 침착했다고 보겠는데 군에서 특별히 지원해 달라는 요청은 없었습니다.』
▲최병용씨(당시 성북서장·와병중·60).
『27일 하오 7시 사태가 긴박해지자 국장실에서 다시 관할 서장회를 열고 토의했으나 어떤 결론은 얻지 못하고 사태가 아주 위급해지면 성북서는 동대문서로, 동대문은 종로서로, 종로는 영등포서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적 탱크가 수유리 지서에 들어와 있었고 이응준 소장의 제5사단과 이형근준장의 제2사단 일부병력이 미아리 고개에서 전투를 준비중이었습니다. 서에 돌아와 관내 시민에게 피난하도록 가두방송을 하고 유치장에 있던 죄수를 석방했습니다. 밤 8시쯤 돈암교「로터리」에서 지도를 가지고 작전계획을 짜고 있던 이용문대령(비행기 사고로 순직)을 만나 함께 본서로 와서 본부를 세웠지요. 10시30분쯤 서 옆에 사시던 조병옥박사가 서장실에 들러 어떻게 됐느냐고 묻고는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서울대학생 맥주갖고 위문>
밤 11시에 15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내방으로 맥주 2상자, 사과 2상자를 가지고 위문하러 왔어요.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28일 새벽 1시30분쯤 적의 다발총 소리가 들려 이 대령과 전 서원을 철수시켰습니다. 나는 지프로 신설동으로 해서 종로4가로 가다가 적 탱크가 있는 것을 보고 우회, 시경에 가서 사태의 위급을 알렸지요.』.
『나는 다른 것은 그만두고, 아주 슬픈 회고를 하나 하겠어요. 종로서는 일부 서원으로 경무대를 중심으로 삼청공원 뒷산과 창의문 근방에 비상배치를 했어요. 28일밤 1시쯤에 채영식서장 명령으로 유치인들을 내주고 전 서원과 후퇴를 했지요.

<수원가서야 동료폭사 알아>
내 지프에는 10여명의 서원이 매달려 탔는데 처음에는 헌병제지로 강을 못 건너다가 옆길로 빠져 겨우 도강을 했지요. 노량진 사육신묘 앞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북괴병들이 추격, 도강해서 다리를 끊은 줄 알았어요. 수원에 가 서원 점호를 해보니 20여명을 태운 우리 서「트럭」이 간데온데가 없어요. 결국 다리폭파때 희생이 된 거지요. 서장이하 모두 부등켜안고 울었습니다.』
시경 관할 9개서중에서 가장 희생이 많았던 동대문서의 경우를 살펴보자.
▲지재정경장(당시 동대문서 사찰과형사·현 종로서형사과 근무·48).

<동대문서가 가장 많은 희생>
『본서와 파출소를 합해 3백명이었는데 2개분대를 특별 경비경찰로 편성해서 1개분대를 정문에 배치하고, 나머지는 대기했어요. 26일 점심때쯤 나는 정보수집 차 서울문리대 쪽으로 나가 의정부에서 벌써 넘어오는 피난민을 살피고 있었지요. 이때 정훈국에서 지프에「마이크」를 달고 나와『국군이 이미 38선을 넘어 북괴를 무찌르고 있고 평양 함락이 내일 중으로 달성될 터이니「안심하고 돌아가라」는 선무공작을 하는 것을 보았어요. 28일 상오 2시쯤 원남동 쪽에서 적 탱크소리가 들려 몹시 당황했는데 김창선 사찰주임이「우리 힘으로는 안되니 뛰자」해서 전매청 담을 뛰어넘어 종3 골목으로 해서 남산 쪽으로 달렸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본서 안에 남았던 서원들이 카빈으로 탱크와 맞서 싸우다가 상당한 희생을 냈다고 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적은 이날 아침까지도 벽돌로 된 전매청 안에서 항거하는 동대문 서원에게 포격을 가했다. 그후 지나가는 행인들은 10여구의 서원시체가 전매청 앞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것을 볼 수 있었다.

<27일 하오부터 시경마비>
서울시 전체경찰은 27일 하오부터는 거의 기능이 마비되어 조직적 행동이 불가능했다. 특히 후퇴때의 혼난은 극심했다.
일단 후퇴결정을 했다가 다시 번복했는가 하면 최병용 성북서장이 적탱크를 보고 달려와서야, 김태선 국장을 비롯한 시경 간부가 당황하여 도강을 서둘렀다. 이 통에 최운하부국장은 다리위에서 폭사의 참변을 당했다. 또한 시경간부들이 철수하기 전에 독단으로 한강 다리를 건넌 일부서도 있었다.
한편 적침에 직면하여 그 당시에는 무리였는지 모르지만, 군경의 협조가 순조롭지 못했다는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여기 나온 경찰증언의 말을 종합해 보면, 군은 시경에 어떤 협조나 지원도 요청치 않았음을 알수 있다. 또한 시경국장의 차를 한 육군대위가 제지한 것이나 경기도 장단서원들이 서대문쪽으로 후퇴해 들어오다가 역시 군의 제지로 수색으로 퇴로를 돌린 것등은 군경이 혼연일체가 되지 못했다는 단적인 예라하겠다.
군은 한강다리를 끊는다는 것을 사전에 어느 경찰고관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정정=4윌29일자 본 연재 13회 본문의 경기도 경찰국장 이하영씨는 이하영의 오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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