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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고려의 명승 혜소가 세운 홍제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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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홍제원은 고려 초기 절의 부속시설로 설치되어 길 가던 사람들을 공짜로 먹여 주고 잠재워주던 중들의 대민 봉사기관으로 출발, 이조 때는 중국사신이 서울로 들어올 때 이용하는 마지막 역관이였다.
이렇게 근 l천년 동안 거지·행려병자로부터 중국의 사절단까지 이용하고 묵어 가던 홍제원이 본래 이름은 넓게 구제 하다고 해서 홍제원. 병란과 홍수 등으로 몇 번인가 없어졌다가 다시 세워지고 하던 이 건물은 1895년 우리 나라가 대한제국이 되어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끊으면서 헐어버렸다. 한편 이 건물의 주 건물이었던 사현사는 어느 때 없어졌는지 기록조차 없으며 단지 사현사 마당에 세워졌던 5층 석탑은 작년 11월까지 그 원위치에 건재, 고려 초기의 대표적 석탑으로 사학가들로부터 평가를 받아 보물 166호로 지정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
결국 홍제원과 홍제원의 관련 사적들은 작년 11월로써 일체의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다만 홍제동이란 동네이름 하나 만을 남겨 놓았다.
현재 홍제원과 사현사의 원위치는 홍제교 네거리에서 1백m쯤 떨어진 원일 시장의 뒤쪽구석. 그 터는 쓰레기와 폐품 적치장으로 변하여 산더미 같은 오물이 쌓여 있다.
원래 홍제원이 설치되기는 1045년 고려 정종 을유년. 중 혜소가 명승지이면서도 험난한 길목인 이곳에 사현사와 홍제원을 세웠다. 그 당시에 사천을 거슬러 올라가 인왕산 기슭에 승가사 옥천사 등도 같이 세워졌는데 홍제원이 세워진 오늘의 무악재-불광동의 길목은 나무가 우거지고 호랑이와 도적 떼가 들끓던 곳. 서울(남경)서 개성, 평양으로 가는 이 국도에 길 가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태조가 서울에 도읍하면서 홍제원을 손질해 명나라 사신일행의 객사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명의 비위를 최대로 맞추기로 국가의 최고 정책을 정한 이 태조는 의주에서 서울까지 1천60리의 명사신 입조의 길에 24개의 영은객사를 마련했는데 24번째의 객사가 바로 홍제원. 중국사신은 23번째인 벽제관에서 무조건 하루를 자고 아침해가 뜨면 출발, 홍제원까지 와서 정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지금의 독립문(옛날 모화루)에서 만조 백관과 어림군을 거느리고 땅에 엎드려 기다리는 조선 임금의 영접을 받았다.
위엄을 갖춘 중국 사신은 반드시 숭례문(남대문)을 거쳐 왕궁으로 들어왔다.
이조 건국 초에서 인조 11년까지 2백50여년 동안 우리 나라를 다녀간 명의 사절은 1백36회. 그후 청의 지배를 받은 2백50여년 간에도 비슷한 횟수의 사절이 다녀갔다. 그 일행은 보통 22명인데 적을 때는 14명이었고 많을 때는 75명까지 됐다. 사신의 중국에서의 지위는 대개가 환관. 높아야 한림원 수찬 또는 소감, 좌감 정도. 특히 사신 중에는 조선에서 인공으로 고자가 되어 중국으로 징발되어간 환관도 많았다.
그래도 임금은 아파서 기동을 못할 정도가 아니면 반드시 모화루까지 나가서 수십번 절을 하고 만세만세만만세를 선창한 다음 맞아 들여야 했다. 사신들의 주임무는 대개 양국의 경조사와 임금 즉위 및 세자책봉의 인가장을 들고 오는 것인데 때로는 『소 1만필을 내놓으라』 『말 3천필과 화자(환관될 사람) 10명을 내놓으라』 『처녀 10명과 백금 3백냥을 내놓으라』는 등 인·축과 재물을 강요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사신을 보낸다는 통첩(비문)이 오면 우리 나라는 정이품 이상의 당상관을 머리로 영위단을 구성, 압록강 건너 구연성에서부터 계속 술과 여자로 대접, 공식적으로 40번 연회를 열어 주는데 세종 때 조선인 환관 김인보 등은 장장 2개원간 금강산 등 산천을 구경하고 잔뜩 뇌물을 받아 가기도 했다.
독립문이 설 때 모화루와 홍제원이 같이 헐렸지만 당초에 불도의 자비심을 베푸는 구휼기관으로 출발한 홍제원이 후반기 5백년 동안은 홍제원이 되어 중국에 아부한 것은 이조 정치야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손석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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