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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거리로 변한 서울 내수 청계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청계천은 깨끗한 물과는 아예 인연이 없는 물줄기. 청계천은 서울과 함께 생겨났으나 1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복개공사로 대부분이 지하로 잠적, 지금은 신설동에서 뚝섬까지 그 꼬리만 남아 있다.
복개된 길 위에는 옥상옥으로 고가도로가 서고 이중으로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어 오늘날 청계천이란 이름은 개천 이름이라기 보다는 종로·을지로와 같은 거리의 이름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하에서 여전히 흐르고있는 청계천은 한강과 더불어 서울을 형성해온 쌍벽의 물줄기. 이조 5백년 동안 한강은『서울의 외수』로서 운송을 담당했고 청계천은 『서울의 내수』로 시민들의 하수와 오물을 처리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임무를 다하고있는 청계천의 나이는 5백 60여세. 옛날 실개천에 불과했던 시내가 이조초기 태종 때 이조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졌다.
고려 때는 이름조차 뚜렷하지 못했던 작은 도랑이던 것을 이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하면서 삼남 지방의 장정 5만명을 징발, 6개월에 걸쳐 완성, 개천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세종 때는 경교천, 중종 때는 경사천, 현종 때는 대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청계천이란 이름은 현종(l67I년)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서울에서 가장 더러운 개천에 가장 깨끗한 이름이 붙여 진 것은 서울의 도시 발달열이 얼마나 개천을 더럽혀 왔는가를 대변해 주고 있는 산 증거이다,
청계천이란 이름은 옛날에 이 개천이 깨끗했던 이유도 있지만 청운동에서 시작, 대학천(쌍계천)과의 합류로 큰 물줄기를 이루고있기 때문에「청」자와「계」자가「플러스」된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도심을 꿰뚫어 9·6㎞를 달리며 인왕산 북악산 남산 등에서 내려오는 10여 개의 개울과 합류, 뚝섬 쪽 한강으로 빠지는 청계천은 옛날에 때때로 서울시를 물바다로 만드는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세종 8년(1426년)에 큰비가 오자 청계천이 넘쳐흘러 1백 여채의 집이 떠내려갔고 수 백명이 죽었으며, 영조 36년(1760년)에는 광화문 앞까지 급류가 휩쓸어 수천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래서 역대 임금들은 청계천 치수에 신경을 써 왔다. 특히 물난리에 크게 혼이 난 영조는 대대적인 청계천 보수 작업에 착수, 그해 전국의 장정 20만명을 동원해 준설을 했다. 공사비로 쌀 4천 6백 가마와 돈 3만 5천냥을 들여 57일간 작업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대 준설 공사의 결과 서울의 지도가 달라졌다.
준설한 흙더미로 청계천 변의 광범위한 늪지대를 메웠기 때문. 새로 생겨난 마을이 오늘날의 방산동과 서울 운동장일대다.
영조는 둑을 높이 쌓고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큰 공사를 마친지 2년 후 또 큰 물난리가 나 둑이 무너지고 버드나무가 쓰러져서 버드나무를 뽑아버리고 대신 화강암의 석축을 쌓았다. 이때부터 지금의 청계천 모습이 바로 잡혔다.
20여 리가 넘는 청계천에는 광교·수표교 오간수교 등 14개의 돌다리와 목교 2개가 있었다.
이들 다리가 대부분 복개공사로 철거 또는 이전 됐는데 광교만은 그대로 복개된 밑에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가장 오래되고 국보급의 석교이어서 복개에 지장이 있는 난간만은 떼어서 경복궁으로 옮기고 후세를 위해 원형과 원 위치를 보존했다. 종로와 을지로 입구 중간에 위치한 광교는 이조 3대 임금 태종의 심통의 소산이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은 개국에 가장 공이 컸지만 태조의 사랑을 받던 계모 강비 때문에 세자 책봉 경쟁에서 밀려났었다. 강비가 죽은 후 강비의 아들이며 이복 동생인 세자 방석을 「쿠데타」로 죽이고 왕이 된 방원(대종)은 정동에 있던 강비 능을 정릉으로 마구 파서 옮겼다. 그리고 아버지 태조가 제주수사 여의손을 시켜 전국의 명공을 모아 정성들여 만든 강비 능의 수장석 12개와 능침석 등으로 광교를 만들어 버렸다.
청계천은 영등포를 제외한 서울 전역의 오물·오수를 한강으로 옮기고 있다. 그래서 뚝섬 서쪽 한강 하류는 대장균이 들끓고 수영이 금지되고 있다.
요즈음도 3, 4년에 한 번씩 준설공사를 하는데 57년에는 자그만치 5개월에 걸쳐 21만 4천여 입방m의 썩은 흙을 파냈다.
옛날에는 물에 떠내려가지 않는 쓰레기까지도 버렸던 모양. 세종 때 이현로가 쓰레기와 오수를 못 버리게 하자고 건의했으나 세종이 불허, 시민들의 편의를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이래 청계천은 더러운 개천이 되고 말았다.
51년 l·4 후퇴 때 서울이 텅 비어 맑은 물이 흘러 피라미 송사리 떼가 꼬리를 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손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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