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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론|이창열 -고려대 교수(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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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은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나날이 변모하고 있다. 사막 속에서 신기루가 나타나듯 불과 몇 해 사이에 기적과도 같은 발전이 이루어 졌다. 성북「스카일라인」에서 저녁놀에 잠겨 가는 도심지를 바라다볼라치면 고층「빌딩」이 임립한 모습이 마치 「뉴요크」의 「맨허턴」을 방불케 하는 한 폭의 사진이 전개된다. 근대도시로 성장해 있는 오늘의 서울에서 10년 전 또는 5년 전의 초라하던 그림자는 회상해 보기조차 힘들다.
인구 5백 18만 명에 이른 1970년의 대 서울. 이미 세계의 10대 도시의 하나로 등장한 셈이다.
5년 전 까지만 해도 서울의 인구는 3백 80만명 이었다. 어느 사이에 굵어 졌는지 날마다 또는 밤마다 잘도 줄기차게 커져온 것이다. 해마다 40만명 가량씩 서울의 식구는 부풀어 왔다. 이중 자연 증가는 8만 4천명 정도 하루 230명 꼴로 늘어왔으며 매 시간당 18명이 출생되고 7명이 죽어간 계산이다
지구 위에서 날마다 35만 명의 출생이 있는 요량치고는 적은 것이라고 하겠으나 도시로 집중되는 사회적 증가인구까지 합칠땐 70년대 말의 서울인구는 8백만명을 헤아릴 판이다. 이것은 성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폭발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같다.
도시화에 대처하는 찬가도 있고 탄가도 있다. 또한 인구 폭발과 더불어 성장한다. 서기 원년엔 지구상에 2억의 인구밖엔 없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고대 도시와 그리고 「르네상스」의 자유도시 는 시민에게 법 · 대학· 정치를 통해서 문명의 찬가를 노래부르도록 하는 연장이었다. 이 자유 도시는 왕조의 출현과 더불어 파괴되었다
행복과 안전을 베푼다는 고대 도시는 오늘의 기계문명의 대도시와는 다르다. 오늘의 세계의 대도시는 역대 왕조가 출현하지 않았더라도 도시 속에 존재하고 있는 스스로의 요소에 의해서 불행과 불안과 혼란 속에 빠질 수 있는 것이었다.「파리」의「소르본」대학생들은 기숙사 안에서의 남녀학생의 교제의 자유화를 내걸고 불만을 터뜨린 것이 재작년 5월의 일이었다. 이 불만은 도시의 생활 현장에서 빚어지는 빈부의 격차, 주택난, 교통난 ,대기오염, 오락시설 등으로 말미암아 도시민의 평소의 불만에 기름을 부어서「파리」시민의 폭동으로 번져 갔다. 또는「시카고」의 흑인 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시카고」에 하늘 을 찌르는 「빌딩」이 높으면 높아질수록 미국의 번영을 상징할 것이다. 그러나「빌딩」사이 꼴짜기에서 햇볕도 못 보는 우리 흑인에겐 너무나 참혹한 번영이다.』
대 도시에는 스스로의 병마가 따르기 마련이다. 「메트로 ·폴리스」를 찬양하던 옛날의 도시론자 들은 오늘 같은 입으로「메트로·폴리스」(거대도시)를 찬미하며「에큐메노·폴리스」(전세계도시)의 출현을 미래도로 삼고 있다.「메트로·폴리스」에 만족하던 시대의 대 도시는 도시 속에서 풍겨 나오는 모든 문제가 비교적 간단하였고 그런 나름으로 행복과 안전과 문명을 즐기게 하는 구석과 꿈이 있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니「에큐메노·플리스」로 대도시의 판도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서 행복엔 비참이 깃들이고 안전엔 혼란이 커지고 문명엔 참해를 덧붙이는 것이 되고 있다. 도시의 집중적인 성장은 그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인간과 인간성과 인간상을 또한 변질시켜주고 있다. 전원 도시 속에 있던 인간은 육체와 영혼과에 그 나름으로의 균형과 조화가 있었다.
그러나 「빌딩」의 임립 속에서 지하도와 동굴 같은 지하층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에겐 기계의 부분이 되기를 강요당하고 있으며 치차가 충돌하며 윤활유가 타는 위험 속에서 일생을 살아야하며 정신과 육체가 지리멸렬되어 가는 도깨비 적인 자연인간 아닌 도깨비 적인 또는 괴뢰적인 일면이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 속에서 숨쉬고 도시에서 죽어 가는 인간은 오늘 전 세계를 통하여 나날이 불어나고 있다. 그들은 평생을 전원을 동경하고 자연을 찬미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음미할 겨를도 없이 교통지옥, 빈민굴, 각종 공해, 혼탁과 혼잡에 젖어가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 발전이 공업화로 전개되면 될수록 공업도시는 커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처럼 공업화가 따르면 빠를수록 도시인구는 급격히 팽창한다. 미국선 건국당시 도시 인구는 총인구의 5%에 불과 하였다. 오늘 총인구의 75%가 2백을 헤아리는 도시에 집중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도시화의 속도는 훨씬 빠르며 단 시일 내에 추진되고 있다. 그 대표이며「챔피언」격이 바로 서울인 것이다.
숨막히는 서울은 여러 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먼지·소음·세균·「개스」등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눈에 보이는 혼잡과 위험은 더욱 두드러 진다. 그리고 인간 사이의 불균형은 더욱 커지고 사회 불안과 불행인구를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공업화가 진행할수록 도시화를 막을 수는 없다.
서울 도시를 어떻게 꾸미며 이끌어 가야 옳은가. 도시화는 서울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얼마 전 까지 장안이라고 하고 한양이라고 할 땐 그 나름의 정서와 역사가 있었다. 경성이라고 할 때도 특수성은 뚜렷하였다.「런던」탑과,「템즈」강,「베니스」의 수향 도시,「암스데르담」의 분위기,「시드니」의「레스토랑」,「멕시코」시의 박물관,「빈」의 여사, 「파리」의 개선문,「방콕」의 사원, 「쿠알라룸푸르」의 총독청,「마닐라」의 수도원 등등은 그들의 코다. 건축 양식의 특징, 역사와 전통에 젖은 골목과 추녀 끝 등이 유서를 자랑하며 도시화의 공통성 속에서 인간성에 숨통을 마련해 주고있는 것이다. 고층화만이 능사인 최근의 서울도시는 시민에게 공해·주택란·교통 지옥·물 기근 이외에 무슨 정서를 어떻게 가꾸어 주고 있는가. 원야 속에서 대도시가 출현하면 한동안은 자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뒤이어서 두드러질 도시의 반항을 어떻게 해결할 셈인가. 야만과 문명이 충돌하는 명동 골목에서 서울 시민은 어떻게 지옥을 탈출하고 안주와 위안을 얻으며 건전한 도시의 발전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해방 이래로 인력차는 승합 삼륜차로 변하였고 역마차는 합승으로 진화 하였고 오늘도「버스」·「택시」·자가용이 밀림 속의 맹수 이상의 포효를 부르짖으며 돌진하고 있다.
넓어지는 수도권도 좋고, 「메갈로·폴리스」화 하는 발전도 좋지만 문제의 핵심은 도시가 주인이 아니라 시민이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마련하는데 있을 것이다. 여기 서울의 설계가 있다. 8백만으로 늘어날 집중화의 대책은 무엇인가. 「메갈로·폴리스」이전에 한국 땅을 전역으로 하는 한국의「에큐메노·폴리스」는 전개될 수 없는가. 지역개발이라고 손쉽게 말하지만 지역 도시의 발전 대책을 보다 진지하게 설계하지 않고서는 서울의 설계도 진행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도시의 윤리를 찾을 수 있는 방향에 우리의 집념은 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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