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자동차단이 되레 승객 감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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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 남자가 지하철에서 저지른 방화가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빚은 것과 관련, 적지않은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인화성이 강한 휘발유에 불을 붙여 일어난 화재라 할지라도 피해가 너무 컸던 것은 지하철공사의 대처방법과 방재시스템의 허점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전기가 너무 빨리 끊겨 희생자를 늘렸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하철 전기 공급설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동차 주행에 필요한 고압전류(2만3천V)를 공급하는 직류 전원 설비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조명 등에 필요한 일반 전기(2백20V)를 공급하는 교류 전원 설비다.

대구지하철은 화재가 발생할 경우 전기를 자동 차단하는 보호계전기가 작동해 직류와 교기전기가 순차적으로 끊기는 방호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고 당일인 18일 오전 9시55분쯤 화재가 발생하자 2분 뒤 주행용 전원과 조명용 전원이 거의 동시에 끊겼다.

이 여파로 화재 직후 중앙로역에 진입한 1080호(기관사 최상열.39) 전동차는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였고, 역 건물 조명이 모두 꺼져 승객들은 탈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전력 및 운전사령실 등의 제어시스템이 마비돼 화재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대처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구지하철 관계자는 "화재가 나서 과전류가 흐르면 전선 속의 구리가 전기난로의 코일처럼 뜨거워져 화재를 확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전기가 자동 차단되도록 설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일부 전기설비 전문가들은 주행용 전원설비는 내화(耐火) 케이블을 쓰고 불에 타지 않는 철제 구조물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큰 문제가 안된다고 주장한다.

역사용 전원설비도 전선이 모두 전선관 속에 매설돼 있기 때문에 화재에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와 관련, 전기공사협회 관계자는 "주행용 전원 설비는 화재 그을음 등이 낄 경우 전기가 그 사이로 흘러 대규모 감전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며 "감전 사태를 막기 위해 주행용 전원을 차단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 조명 등에 쓰이는 일반 전기까지 같이 끊기도록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구지하철의 방호 시스템이 인명 대피나 보호엔 취약성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결국 전기.신호체계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자동 안전시스템이 오히려 희생자를 늘리는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전기가 끊기더라도 배터리 전원으로 켜져 탈출 방향을 알려주는 유도등에 대해서도 "전혀 켜진 게 없었다"는 승객들과 "짙은 연기 때문에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 켜져 있었다 "는 지하철공사의 주장이 엇갈린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유도등이 정전에 대비해 최소한의 동선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밝기가 약해 이번 화재처럼 짙은 연기가 깔렸을 때는 켜졌더라도 무용지물이었을 것으로 본다.

자동 열차운전장치와 자동 제어장치의 혼합형태로 운영되는 전동차 운행시스템도 비상시 인명피해를 줄이는 데에는 역효과를 낸 것으로 드러났다.

지하철공사 측은 "전동차가 역에 도착하면 전동차 하부의 기계장치와 역에 설치된 센서가 상호 감응해 자동으로 출입문이 열리고 닫힌다"고 설명했다.

인력절감.운행의 안정성 면에서 우수한 이 시스템은 전력공급이 끊기자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결과적으로 승객들을 위험 속에 감금하는 역할을 했다.

화재시 자동 차단되도록 설계된 역 구내의 방화벽 역시 화염과 매연의 확산은 막을 수 있겠지만 비상시 승객 탈출에 대한 배려는 도외시한 시스템이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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