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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과 기이하게 어울리는 이 난삽한 음향!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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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호 27면

쯉MI

남부럽지 않게 며칠 아팠다. 여름 몸살은 일종의 휴식 같은 것일 텐데 살이 떨리고 천장이 오르내리고 하루 20시간쯤은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면서도 그 와중에 냉장고로 기어가 무언가를 입에 구겨넣고는 했다. 빠삐용이다. 요망한 줄 알면서도 죽음을 많이 생각했다. 이 고통에서 한 치 넘어가면 죽음이 있겠지. 문학 작품에서는 ‘달콤한 죽음’ 운운한다. 치열한 구체성이 있다는 의미로 ‘철면피한 물질!’이라고 죽음을 묘사한 시구절도 있다.

[詩人의 음악 읽기] 메시앙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

그러나 나는 부러지게 몸이 아픈 와중에는 어떠한 언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다만 사나흘 지나 진통제가 효력을 발휘할 무렵, 몸이 아파 생의 끝장을 떠올릴 때쯤에 어울리는 사운드 트랙을 하나 찾아냈다. 올리비에 메시앙의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큰 사진)이 그것이다. 몸살 회복기와 이 난삽한 음향이 어울릴지 의아스럽겠지만 한번 실험해보시기를. 몸살이 찾아오지 않으면 벽에 머리를 처박든지, 다른 방법으로 몸을 괴롭혀 놓고 들어봐도 괜찮겠다.

작곡가 메시앙이 포로 신분으로 나치수용소에서 작곡해 수인(囚人)들 앞에서 연주한 곡. 이 곡은 이처럼 드라마틱한 배경 설화로 잘 알려져 있다. 어째서 ‘세상의 종말’이라는 제목이 나왔는지 대뜸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라루스 음악사전의 조금 상세한 설명을 찾아보면 숙고의 여지가 많아진다. ‘세상의 종말’이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성 개념의 끝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말을 위한’이라는 표현은 파국이 아니라 ‘영원의 시작’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대재앙 앞에서 왜 불멸과 영원성에 대한 갈망이 생겨날까. 차라리 완전한 끝장을 원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 아닐까. 하긴 재앙과 절망 너머의 세계를 떠올리지 못하는, 무지하고 단순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여름 몸살에 쩔쩔매던 빠삐용은 죽지도 않았고 영원의 시작에 다다른 것도 아니지만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은 계속 듣고 있는 중이다.

병통이 끝나갈 무렵 시인 황인숙(작은 사진)이 찾아왔다. 1978년 문학과 지성사 데뷔 시집부터 총 6권을 묶은 자기 시선집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시선집 타이틀을 두 번째 시집의 작품 ‘꽃사과 꽃이 피었다’에서 따왔다. ‘사과’가 등장하니 아름다운 가을의 서정쯤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꽃사과라는 것은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열매를 뜻한다. ‘내 청춘, 늘 움츠려 아무것도 피우지 못했다, 아무것도’라는 구절은 그래서 나온다. 시선집 안에는 나도 일부 들어 있다. ‘삶의 시간을 길게 하는 슬픔’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어느 가을날 삼십대의 우리가 찻집에 함께 있을 때 분명히 내가 했던 말이다. “슬픔은 생의 시간을 길게 느끼게 만들어줘”라고. 그 사연이 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억울해? 억울하지. 당신을 저버린 연인이 무섭게 차갑다고?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그때 그녀는 내 실연의 한탄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역할이었는데 나는 그 시절 그녀의 죽음 같은 고독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황인숙 시인은 록그룹 헬로윈의 노래를 좋아한다지만 메시앙의 ‘세상의 종말’을 함께 듣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양파의 모든 껍질을 다 벗겨낸 상태가 그녀의 작품 아닐까. 벗겨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수북한 껍질의 잔해가 쌓인다. 그녀의 시를 읽다 보면 그 잔해들의 추함에, 황폐함에, 시들고 늙어감에 전율을 느낀다. 시편들이 말하고 있다. ‘이 잔해들을 보세요. 어떤가요?’라고. 30년간 보아온 그녀는 물질적으로 극빈하게, 정신적으로 무상하게 늘 세상의 끝을 대면하고 사는 것 같다.

메시앙 음악이 20세기의 출발이라면 황인숙 시는 19세기 말 정서에 닿아 있다. 전체 8곡으로 구성된 ‘세상의 종말’ 사이사이에 그녀의 시를 끼워넣듯이 듣고 읽으며 나는 충돌하는 선율과 언어를 통해 어떤 해방감을 맛본다. 이 세상에 살아남아 애절하게 염원하는 모든 것들의 사소함이라니! 계속될 줄 알았던 것들의 놀라운 유한함이라니!

‘세상의 종말’은 극심한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작곡되었다. 4중주곡의 편성이 바이올린·첼로·클라리넷·피아노라는 기묘한 조합을 이룬 것은 수용소 안에 악기가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악기들이 합주보다는 딴청을 부리듯이 각기 따로 연주하면서 진행된다. 절규와 침묵을 동시적으로 의미하는 메시지가 그렇게 표현된 것이리라. 자기 인생이 늘 움츠려 아무것도 피우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메시앙과 황인숙을 합체한 시간을 가져 보자. 지금 나는 바로 그런 시간 속에서 통증을 느끼고 있지만 혹시 어쩌면 과거와 미래를 벗어난 ‘영원의 시작’을 살짝 엿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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