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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종각|태조7년 처음건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5백년가까이 겨례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온 보신각 인경은 지금도 종로네거리 한모퉁이에서 경축일마다 종소리를 울려 시민의 가슴속에 어제와 오늘을 잇게 해준다.
보물 2호인 보신각은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부터 파누(새벽 3시), 인정(하오 7시)을 알리기 위해 설치된 인경이다. 파누때 28번종을 우리면 서울 도성의 8대문이 열려 백성이 통행할 수 있으며 인정때 33번 울리면 8대문이 닫쳐 성내외의 교통이 차단되었다. 인정소리는 술꾼들의 발길을 재촉케 했으며 8대문이 닫친 다음에는 순라꾼이 순시를 하여 통금위반자를 단속했었다.
현재 보신각에 걸려 있는 인경은 세조14년(148)에 부어 만든 것으로 5백여년동안 5번 자리를 옮기고 5번 화재를 치르는 수난을 겪어왔다.
서울에 시각을 알리는 인경을 처음 설치한 것은 태조7년(서기l398)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이때 만든 종은 청운교 서쪽(현「파고다」공원앞)에 있었으나 태종13년(1413년)순금사남, 광통교북(현 화신앞 네거리)에 종루를 새로 짓고 옮겨졌다. 세종은 종루를 밑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층누로 다시 지었고, 세조는 1458년 새종을 만들어 달았다. 이후 1백30여년간 이종이 사용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층루와 함께 불타버렸다.
선조실록에 보면『종루파 종은 토중에 개입하여…5분지2는 소융되어…남은 것은 약 2만근이 될 것같다…파종은 대포로 첨주함이 좋을 것 같다…. 상왈, 경파함은 불가하다』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때 인경은 약 3만∼4만근정도였고 왕은 이동을 중기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광해11년(1619년)폐허된 종루자리에 다시 1층각을 짓고 옛날 원각사 종을 달았는데 이것이 지금 보신각종이다. 원각사 종은 세조14년 불구로 쓰기 위해 동 4만근을 부어 만든 것이다.
성종때 서울 시내에는 임진왜란때 녹아버린 종루 종외에 종각 종(광화문 누위에 있었음),원각사 종, 선종(흥천사내)이 있었다.
어느 날 신숙주는 임금에게『…동방은 목에 속하므로 금성이 음살하는 기가 대성함은 불가하다』고 글을 올려 도성안에서 종을 치는 것을 제한하려 했고 특히 원가사 종에 대해서『…그 소리가 진양단속하여…불상으로 여기는 바…인심이 흥요하니…개주토록 청한다』고 헐뜯기도 했다.
그러나 l504년 연산군이 원각사를 없앰으로써 원각사 종은 방치되었다가 중종31년(1536)김안로의 의견에 좇아 숭례문(현 남대문)에 달았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종루종이 타버리자 남대문에 달았던 원각사 종으로 선조30년(1597)남대문에서 인정과 파누를 다시 알리기 시작했다. 이 종소리를 듣고 도성안 백성들은 국난을 치른 슬픔을 되새기며 목이메어 했다는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정유년 왜란때 당장양호가 이종을 명례동(현 명동천주교성당 앞)언덕에 옮겼었다. 19년후인 광해11년(16l9)종루 옛터에 1층각을 새로 짓고 명례동에 있는 원각사 종을 다시 현 화신 앞으로 옮겨왔으나 8일만에 큰 불이 일어나 종루가 타버리고 말았다.
고종22년 다시 짓고 32년(1906)보신각이라 이름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일정때인 1915년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원위치에서 위로 조금 물렸었다.
6·25때 폭격으로 다시 불에탄 종은 한꺼풀이 벗겨졌으며 1953년 중수할때 도시계획때문에 또한번 뒤로 물려 앉혔다.
당초 원각사 종이었던 현재의 보신각 청동대종은 높이 3.18m, 구경 2.28m 종신에 대문이 들려 있는 것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고 정상에 용뉴가 달려 있다. <김영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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