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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다문화가정, 글로벌 시대 브랜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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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아직 반일감정이 심했던 시절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감정 속에서 불편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 했다. 시장에 갔더니 “일본사람에게 팔 물건은 없다!”고 돌아서버리는 가게 아주머니. 하숙집에서 한국학생이 “일본사람은 싫다!”고 외쳐서 방에서 나가지 못했던 밤도 있었다.

 그런 내가 한국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을 때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될 일들이 훤히 보일 듯했다. 실제로 초등학교에 들어간 두 아들은 학교에서 엄마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감췄다. 한국학교에서 영토문제나 역사문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본사람의 피를 가진 우리 아이들은 긴장하고 친구들의 시선 속에서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했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들이 초등학교 4, 5학년 때 남편의 사업관계로 우리 가족은 중국으로 가게 됐고 현지에 있는 일본인 학교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한국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한·일전 축구경기가 있어도 그 열광을 친구들과 공유할 수 없었다. 한국사람에 속할 수도 없고 일본사람에 속할 수도 없는, 정체성을 알지 못해 어린 아이들이 혼란을 겪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은 중국소재의 한국인 학교를 다니게 됐다. 어느새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는 존재로 친구와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됐다. 친구들이 “독도는 누구 땅이야?” 라고 물을 때도 당당하게 “내 땅이야!” 라고 재치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아이가 됐다. 한국과 일본의 두 환경을 넘나들면서 ‘내 것’ ‘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느끼고 ‘우리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국경의 경계선은 이미 철폐된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현재 중국, 미국, 북한 등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과 감정의 대립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다문화가정 2세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문화가정은 어느 한쪽 나라의 이익만을 생각할 수 없다. 양쪽 나라 모두가 ‘우리 나라’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에는 많은 다문화가정이 있다. 한국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가정이 많아서 한국정부와 국민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에 대해 나도 다문화가정의 일원으로서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다문화가정을 언제까지 ‘사회 배려 대상자’로만 볼 것인가? 알고 보면 두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두 나라 문화를 지니고 있고 ‘우리’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글로벌시대를 살아가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는 브랜드 가정이 아닌가.

 다문화가정이 싫다며 울었던 큰 아들은 얼마 전에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일본국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군대를 안가는 방법도 있었는데 자진 입대해 사단장님 표창을 받기도 했다. 작은 아들은 대학교를 다니면서 장교후보생으로 학군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이제는 정체성 문제로 방황하지 않고 ‘다양한 문화를 지닌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싸우지 않고 잘 지내주기를 바라는 것이고 한국이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닦는데 다문화가정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다문화가정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한국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카쿠타니 유우코 선문대 글로컬 다문화가정센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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