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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이 된 구직자들 … 중소기업 미스매칭 채용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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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 자리 잡은 M사. 2004년 출범한 이 회사는 e러닝에 경영컨설팅, 웹에이전시, 광고대행까지 다루는 꽤 알려진 기업이다. M사는 지난달 15일 취업포털에 직원 모집 공고를 내고 2주간 원서를 받았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신입과 경력(개발, 영업) 직원 수 명을 고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접수된 입사원서는 5장이 전부였다. 신입 1명과 경력 4명이었다. 그나마 2일 최종 면접에 참석한 사람은 신입을 포함해 3명이 전부였다. 경력직 2명은 “면접 시간이 개인 스케줄과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오지 않았다. 이 회사 서모 대표는 “취업지원서를 내고도 개인적인 일로 면접을 보지 않는 경우가 워낙 많아 그러려니 한다”고 말했다.

예의에 벗어난 경우 다반사

 이날 면접은 여느 대기업에서 보는 면접과는 아주 달랐다. 한 지원자는 “왜 지원했느냐”는 질문에 “좋은 회사에 다니려 경력을 쌓으려 한다. 프로젝트별 프리랜서로 일한 적도 있는데 납기를 안 지킨 경우도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면접이 끝난 뒤에는 “(합격 통보를) 전화보다는 e메일로 달라. 친구를 만나야 하니, e메일 체크가 편하다”고 했다. 또 다른 지원자는 장기근속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회사가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답했다. 서 대표는 “대기업 면접에서 이런 대답을 들을 수 있겠느냐”며 “당당한 건 좋지만 구직자로서의 기본 예의를 벗어난 경우가 많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의 게임·보안 솔루션업체 인사팀 김모(38) 과장도 최근 황당한 경험을 했다. 지원자에게 면접 날짜를 알려주려 전화를 걸었는데, 지원자가 “지금은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서 바쁘다. 오후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해서 시간이 없다. 문자로 면접날짜와 회사 위치, 지도를 남겨 달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것이다. 또 다른 지원자에게서는 “이 회사의 비전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고 “회사에 대한 정보도 없이 지원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면접에 나온 이 지원자는 면접이 끝난 뒤 “며칠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라며 회사를 나섰다.

“중소기업 경시 풍토 만연”

김 과장은 “합격자 발표도 안 했는데, 본인이 연락한다고 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최근 들어 이런 일이 너무 잦아 중소기업을 경시하는 풍토가 만연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이들 회사의 대졸 초임은 2000만~2500만원 정도다. 경력직은 별도로 경력을 가산해 지급한다. 올해 초 중소기업중앙회가 10인 이상 중소기업 500곳을 상대로 조사한 대졸초임 수준(1600만~2400만원)보다 높다. 물론 대기업의 대졸 평균임금(3352만원, 올해 3월 취업포털 조사)보다는 낮다. HR교육 전문기관인 인키움의 조재천 대표는 “연봉이 낮은 것이 중소기업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중소기업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편견이 중소기업의 구인난을 부추기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렇다 보니 인력 채용시장에서 중소기업은 을(乙)이고, 구직자가 갑(甲)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직장 옮기는 메뚜기족 많아

 조 대표는 “경력직원도 이력서를 보면 대부분 1년 미만으로 직장을 옮긴 메뚜기족이 많다”며 “경력을 쌓아 전문가가 되려 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기업에서 일하기 전에 임시 방편으로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 구로구의 모 업체에 지원한 한 경력직원(32)은 5년 새 7군데 회사에 근무했다. 5~7개월 근무하고 회사를 옮겼다. 그동안 임금은 계속 떨어졌다. 이 지원자는 “임금이 떨어져도 제대로 된 대기업에 취업하기 전까지는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이근면 전 삼성광통신 대표는 “중소기업을 경시하는 풍조가 중소기업 미스매칭(취업난으로 인한 일자리 수요·공급 불일치)의 가장 큰 원인”이라며 “청년들의 취업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인문학 교육이 취업교육과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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