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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유전무세, 무전유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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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윤호
논설위원

“불이야!” 행인이 외친다. “어디요, 불 난 곳이?” 소방관이 묻는다. “세무서요.” 잠시 뜸 들인 뒤 하는 말. “그래? 그럼 놔두지 뭐.”

 2006년 일본에서 출간된 『징세권력』의 첫 머리에 나오는 얘기다. 일본 국세청 직원들 사이에 오가는 자조적 농담으로 소개돼 있다. 세무 공무원에 대한 껄끄러운 반응은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 아닐까.

 ‘국세청 연구’라는 부제의 그 책은 세무조사에 얽힌 얘기, 정치인과 국세청의 견제와 공생, 세무서의 정보력 등을 생생하게 다뤘다. 우리 국세청을 소재로 이런 책을 쓴다면 머리글에 올릴 일화는 역시 CJ와 국세청 간부들의 유착 아닌가 싶다. 특히 전직 청장이 CJ에서 전해 받았다는 거금을 ‘취임 축하인사’로 표현한 부분이 압권이다. 온갖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나. 축하금을 CJ만 줬겠나, 축하금 받은 청장이 혼자였겠나….

 이번에 걸린 전직 청장은 재직 시절 ‘따뜻한 세정’을 내걸었던 분이다. 당시엔 그 의미를 잘 몰랐지만 이젠 좀 알 것 같다. ‘훈훈한 정이 오가는 세정’으로 풀어 쓰면 금방 감 잡히지 않나. 이젠 그도 힘 쓸 일 없겠다 싶은지 현직 시절 그와 주고받던 ‘훈훈한 정’을 뒤늦게 제보하는 기업도 있다고 한다.

 원래 국세청의 신뢰도는 결코 나쁜 편이 아니었다. 2011년 중앙일보·동아시아연구원의 파워기관 조사에서 국세청은 국가 기관 중 헌법재판소·대법원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신뢰도를 기록했다. 세정자료의 전산화 비율도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고, 직원들의 전문성·직업의식·투명성도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부 고위직이 더럽게 망가지다 보니 기관 전체의 이미지에 금이 간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명박 전 대통령이 2년 전 “역대 기관장이 가장 감옥에 많이 가는 데가 농협중앙회와 국세청”이라고 말했겠나. 적나라한 징세권력은 아직 시퍼렇지만 그 권위와 신뢰는 자유낙하 중이다.

 사고 때마다 개혁안은 많이 나왔다. 부패와 유착의 고리가 될 법한 재량권을 제한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서도 징세권력의 상징인 세무조사에 대한 게 많다. 도대체 세무조사는 어느 법에 따른 것인가. 국세기본법에 그에 대한 조항이 있긴 하다. 그러나 보다 폭넓고 구체적인 규정은 대부분 국세청 훈령에서 다루고 있다. 국세청의 재량권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뿐인가. ‘공평과세를 위한 최소한의 범위’로 세무조사의 남용을 제한한 국세기본법 제81조 4항도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부동산 투기 단속, 물가 억제, 향락업소 규제, 세수 증대, 재벌 손보기 등 세무조사의 용도는 다양하잖나. 그에 대한 법적 근거를 정비하자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말에 그치고 있다.

 조직도 문제다. 국세청과 전국 111개 세무서 사이에 6개 지방국세청이 왜 필요하느냐는 지적이 많다. 그 외에 청장 임기제 도입, 세무서 인력 재배치, 퇴직자 취업 규제 등 여러 아이디어가 수두룩하다.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국세청이 어디 호락호락 개혁의 칼을 받을 조직인가. 세무서에서 ‘좀 봅시다’ 하면 누구나 움츠러든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학자·언론도 마찬가지다. 그런 징세권력이 정권엔 여러모로 편리할 수밖에. 아무도 국세청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국세청 개혁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려는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세무서 눈치 볼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은 진보가 이 이슈를 선점할 만할 텐데도 조용하다. 국가정보원 개혁을 물고 늘어지는 촛불도 이에 대해선 잠잠하다. 뭘 몰라서인가, 다른 사정이 있어서인가.

 불공정한 법 집행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지금 축하금 줄 돈도, 루트도 없는 중소기업인들의 입에선 ‘유전무세, 무전유세(有錢無稅, 無錢有稅)’가 터져나올 판이다. 그 불만과 ‘공정한 세정’이라는 국세청의 구호 사이에 벌어진 틈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