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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 맞은 대성동, 떡으로 탑 쌓고 기념잔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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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호 10면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대성동 마을회관 마당에서 유엔군 사령부 장교와 외교관, 마을 주민이 남북 통일을 기원하며 떡으로 탑을 쌓고 있다. 조용철 기자

대성동에 갔다. 환갑잔치에 초대받아 두 시간 반가량 머문 짧은 방문이었다. 어르신이 아닌 어느 마을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DMZ내 유일한 대한민국 동네를 가다

 마을회관 마당 한복판에 떡으로 통일기원 탑을 쌓아놓았다. 그 앞에서 벌이는 대성동초등학교 어린이 퓨전난타 공연과 제1사단 군악대 연주에 흥이 돋았다. 회관 정면에 펼쳐진 초대형 태극기 아래, 잔칫상도 푸짐했다. 천막 안의 풍경 또한 화기애애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황진하 새누리당 의원, 정인범 유엔사 한국 수석대표, 어스 거버 중립국감독위원회 스위스 대표를 비롯한 손님들의 표정은 밝았고 마을 주민들은 함박웃음을 날리곤 했다. 300여 명의 참석자들은 그렇게 흥겨운 환갑잔치를 벌였다.

 여기는 남한 유일의 DMZ 안 마을. 들판을 가르는 군사분계선(휴전선)과는 불과 400m 거리며 그 너머로 북한 쪽 기정동 마을이 빤히 보인다. 양쪽 마을 드높은 철탑 위에서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부낀다. 체제 선전 마을이 갖는 상징이다. 대성동과 기정동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남북에 각각 하나씩 민간인 마을을 두기로 한 합의에 따라 그해 8월 3일 조성되었다. 꼭 60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오늘 환갑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모두들 환하게 웃으며 축하하고 있지만 속내는 아픔과 염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로 자못 복잡하리라. 북쪽에서도 잔치를 벌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지난 6월에 대성동을 취재할 예정이었다. 7월 14일자(제331호)로 마친 중앙SUNDAY 기획시리즈 ‘정전 60년…千의 얼굴, DMZ’의 한 부분으로 담을 계획이었는데 유엔군사령부의 불허로 못내 포기해야 했다. 아쉬웠다. 그러다 8월 2일, 대성동 마을 환갑잔칫날이 돼서야 비로소 문이 열렸다. 대성동에는 현재 47가구 214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유엔군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주민에게는 국방·납세의무가 면제된다.

 “본래 우리 마을은 강릉 김씨 집성촌으로 조산리가 옛 이름입니다. 소년 시절에 6·25전쟁을 겪었어요. 전쟁으로 집들이 모두 불타고 움막 같은 데서 살았지요. 처음에는 정부에서 9평, 10평짜리 주택을 지어줬죠. 너무 협소해서 나무와 흙으로 잇대 증축했어요. 그러다 1980년에 지금의 가옥 형태로 신축했답니다. 정책적으로 하나같이 북쪽을 바라보고 지은 집들이라 겨울이면 햇볕이 안 들어요. 그래서 여간 춥고 불편한 게 아니랍니다. 그럭저럭 마을이 환갑을 맞는 사이 옛날의 소년도 세월 따라 늙어가서 어느새 이렇게 백발노인이 돼버렸군요.”

 김경래(79) 할아버지가 마을 원로를 대표해서 인사말을 했다.

김동찬(51)·황연의(50) 부부는 “대성동이야말로 아이들 키우기에 최고”라고 말했다

 마을의 속사정을 40·50대 중장년층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잔치마당에서 자연스럽게 김동찬(51)·황연의(50) 부부를 만났다. 재작년까지 이장 일을 맡아봤다는 김씨 부부 집은 마침 마을회관과 길 하나 사이였다. 북향집 현관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조용히 잔치마당을 빠져나왔다. 유엔사 경비대원들이 가로막았다. 한 컷만 찍자는 사정이 통할 리 만무. 아무리 민감한 DMZ 내 마을이지만 군사시설도 아니고 가정집 앞에서 사진 찍는 것까지 막는 건 좀 지나치다 싶었다.

 “특수한 마을이니 이해하세요. 우리로서는 경비대 대원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죠. 병사들이 총 들고 개인 경호해 주는 데가 여기니까요. 저 북쪽 들판으로 나가면 질펀한 논들이잖아요. 푯말이 낡아 거의 분간도 안 되는 군사분계선 가까이서 일해요. 논두렁하고 군사분계선이 같이 있다고 보면 돼요. 고위험 지역이죠. 거기서 농사일을 할 때면 병사들이 4~5명씩 동행, 경호합니다. 그 덕분에 농사짓고 살죠.”

 김씨는 7만㎡(약 250마지기)나 되는 농토를 경작한다고 했다. 트랙터와 이앙기, 광역 방제기까지 갖추고 있는 대농(大農)이다.

 들판에서 일하다가 북쪽 사람들과 마주칠 때도 있지 않을까?

 “저쪽은 군사분계선과 농토가 꽤 떨어져 있어요. 북한군이 순찰 나오면 우리 쪽이 피하죠. 마주쳐서 서로 좋을 게 없으니까요. (북한군) 상습출현지역에는 감시카메라가 24시간 돌아갑니다.”

 불안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밤 문화시설이 없는 것 빼고는 비할 데 없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강릉 김씨가 절반이 넘어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친척 아니면 외척인데 범죄와 사교육이 없어서 아이들 키우기에도 좋단다. 중학교 과정부터는 외지로 나가서 배운다.

 입학 경쟁률이 7대 1이나 된다는 대성동초등학교가 궁금해졌다. 아까 마을에 들어오며 오른편 차창 밖으로 본 바로 그 초등학교였다. 지척에 두고도 가볼 수 없어서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전교생 30명 정원으로 대성동 주민이 우선이고 모자란 만큼만 파주·문산·금촌 지역에서 충원한다. 정교사 11명에 원어민 영어강사, 수영·스키는 물론 특활을 지도하는 외부강사까지 교육청에서 지원해준다. 가히 명품 초등학교라 할 만하다.

 주민들에게 마을 숙원사업을 물었다. 단열재 시공과 남향집 신축이라고 입을 모았다. 겨울 북서풍이 불면 맹추위가 이어지는데 집들이 낡아서 난방비 부담이 크단다. 심야전력으로 보일러 쓰는 집은 매월 45만원, 기름보일러의 경우는 100만원을 웃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예전처럼 정부(안전행정부)가 나가서 주택개량사업을 해주길 바란다. 그게 어렵다면 현재 등기가 돼 있지 않은 대지라도 불하해 달라는 것. 택지와 농지가 대부분 부동산 소유자 미복구 지역이어서 주민에게는 경작권만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돈 들여 새집을 지어도 소유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마침 옆에 김문수 도지사가 있었다.

 “여기서 겨울에 하룻밤을 자봐서 주민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습니다. DMZ 토지 소유권 문제는 간단치가 않더군요. 지적(地籍)을 복구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독일의 경우 21년이나 걸렸다고 해요. 다각도로 방법을 찾고 있어요.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독일이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죗값으로 동·서독이 분단됐죠. 그래도 그들은 40년 만에 통일했고 DMZ를 그린벨트화해서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만들었어요.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힘이 약해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밖에 없죠. 일본이 짊어졌어야 했을 DMZ를 아무 죄 없는 우리가 뒤집어썼습니다. 억울하지만 우리가 풀어가야죠.”

 경기 북부지역 주민들의 삶은 접경지인 북한과 하나의 생태환경을 공유한다. 말라리아나 조류독감, 솔잎혹파리 방제는 북한까지 해야 효과가 있다. 경기도는 해마다 북한에 약품을 보내왔는데 올해는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지원 길이 막혔다고 한다.

 분단시대, 북으로 향하는 여로의 발걸음은 늘 무겁다. 아픈 역사가 밟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이런 탐방을 ‘북로역정(北路歷程)’이라고 명명해왔다. 평화공원으로 홀가분하게 생태관광을 다닐 날은 아직도 멀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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