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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들 오락? 남녀노소 스포츠! … 당구가 반듯해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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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호 14면

지난 1일 서울 가락동에 위치한 회원제 당구장‘김정규당구스쿨’에서 김정규 원장이 회원들에게 시범을 보이고 있다.  조용철 기자

매캐한 담배 연기, 뿌연 백열전구. 얼룩덜룩한 초록색 테이블 위엔 빨갛고 하얀 당구공들이 데구루루 구른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향을 가늠한 뒤 흰 공을 향해 큐를 힘껏 민다. 한쪽 테이블 위엔 불어터진 짜장면 그릇. 때론 소주에 군만두다. 70~80년대 대학을 다녔던 40·50대 아저씨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고 아련한 당구장의 추억이다.

당구 르네상스

PC방도 노래방도 없던 그 시절, 젊은 사내들에게 당구는 필수과목이었다. 당구 못 치면 간첩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스타크래프트 못하는 거와 똑같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취향도 변하는 법. 2000년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보드게임방·PC방·노래방·비디오방 등 소위 ‘방 문화’는 실내오락의 판도를 바꾼다. 당구 열기는 시들해지고 한물간 아저씨들의 오락쯤으로 전락한다.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성 오락기가 독버섯처럼 확산되면서 아저씨 당구 애호가들마저 빨아들였다. 결국 90년대 초 3만5000여 개에 달했던 당구장은 한때 1만8000여 개로 줄어든다.

그러나 한참을 괄시받던 당구가 2008년을 기점으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당구장 숫자부터 급격히 늘었다. 1만8000여 개까지 떨어졌던 당구장 수가 2010년 2만8000여 개로 회복되더니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질적인 변화다. 중장년 남자들만이 아닌, 남녀노소 다 함께 즐기는 건전한 스포츠로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장영철 대한당구연맹 회장은 “쇠퇴기를 지나 또다시 성장기를 맞고 있다”고 표현한다.

당구의 중흥은 무엇보다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당구장이라면 으레 동네 건달들이 모여 시간을 죽이는 장소쯤으로 여겨졌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노랑머리’ 등 꽤 흥행에 성공했던 국산 영화 속에서도 패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당구장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당구는 더 이상 우중충하고 불량스러운 오락으로 대접받지 않는다.

당구가 건전한 스포츠가 될 수 있음은 요즘 들어서는 당구클럽에 가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김정규당구스쿨’ 회원이 당구 전용 소도구를 이용, 큐 사용법을 배우는 모습.

2011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서 문을 연 ‘김정규당구스쿨’이 바로 그런 곳이다.

상가 2층에 자리 잡은 이곳의 유리문은 늘 잠겨 있다. 문 옆에 지문인식장치가 있어 사전에 등록한 회원들이 손가락을 대야 문이 열린다. 철저한 회원제여서 뜨내기 손님은 아예 받지 않는다. 다만 회원이 데리고 온 지인은 2만5000원짜리 1일 회원권을 구입해 당구를 칠 수 있다. 당구장에 들어서니 200㎡ 정도의 실내에 국제규격의 커다란 당구대 4대가 눈에 띈다. 어두침침한 기존의 당구장들과는 달리 밝은 형광등이 실내를 환히 밝히고 있다. 연한 베이지색 벽도 산뜻하다. 어디에서도 불량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운영방식은 3개월, 6개월, 또는 1년간 등록해 당구를 치는 완전 회원제다. 건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술·담배는 일절 금지다. 가벼운 음료 정도만 허용될 뿐 외부에서 음식을 배달시킬 수 없다. 당구장 한쪽에는 별도의 레슨용 방이 마련돼 있어 일대일 개인지도가 이뤄진다.

이곳의 주인은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인 김정규 원장. 김 원장은 “원래 귀족들의 스포츠였던 당구가 유독 한국에서는 건달들의 사행성 오락처럼 여겨져 왔다”며 “당구를 건전한 스포츠로 정착시키기 위해 당구스쿨을 열었다”고 설명한다.

6070엔 추억 게임, 2030엔 사교게임
요즘 당구계의 새로운 트렌드 중 하나는 실버세대 동호인들의 급격한 증가다. 노년층이 손님의 대부분인 당구장도 속속 등장했다. 노년층들이 많이 다니는 문화센터 중에는 당구교실이 마련된 곳도 많다.

실버세대의 당구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여럿이다. 서울 종로구 관수동에 위치한 ‘국일 당구장’도 그중 하나다. 1400㎡가 넘는 한 층 전체를 다 쓰는 초대형 당구장으로 한쪽은 주로 동호회가 사용하고, 다른 쪽은 일반인들이 당구를 즐긴다. 동호회가 주로 쓰는 입구 쪽 벽면엔 전통 있는 사립고교 동창회의 플래카드가 가득했다. 대낮인데도 100명 가까운 손님들이 25대의 당구대 대부분을 채웠다.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년층이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종로구 인사동의 한 건물에는 ‘세종당구클럽’이라는 당구장이 들어서 있다. 330㎡ 규모의 당구장에는 오전 시간임에도 20여 명의 손님이 있었다.

당구 경력 30년째라는 서병길 원장은 “주로 60·70대가 많이 온다”며 “사회생활을 할 때는 골프나 등산 등을 하다가 퇴직 후 이곳에서 수십 년 전 즐겼던 당구를 치며 다시 젊은 기분을 느낀다는 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노년층에게 당구만큼 적절한 스포츠도 드물다. 대한당구연맹 나근주 과장은 “3시간 동안 당구대를 돌며 게임을 즐기면 대략 4~5㎞를 걷는 셈”이라며 “이 정도면 웬만한 산에 올라가는 만큼의 운동량은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끊임없이 머리를 써야 하는 까닭에 “치매 예방에도 좋다”는 게 나 과장의 주장이다.

이곳을 찾은 김모(65)씨는 “골프, 헬스, 수영을 다 해봤는데 나이 들면서는 당구만 한 게 없다”며 “골프 칠 때는 집중하느라 웃지도 않았는데 당구는 늘 웃으면서 즐길 수 있다”며 예찬론을 폈다.

젊은 층들의 가세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고려대 당구동아리 ‘하이런’의 회장을 맡고 있는 왕형석(23)씨는 “당구를 처음 접했을 때는 단순한 오락이라고 생각했지만 치면 칠수록 깊이 있는 스포츠이자 사교 게임이라는 걸 깨달아 동아리를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초 설립한 이 동아리에는 최소 150점(4구 기준)이라는 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십 명의 신입회원이 들어온다.

회원인 이주영(23·여)씨는 “당구장이라면 으레 젊은 남자들이 담배 피우고 내기하는 곳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났다”며 “당구는 여성들에게도 잘 맞고 재미있는 스포츠라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씨 같은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이 동아리 회원은 남녀가 반반이다.

신세대 당구 애호가들이 늘어나면서 신촌 등 대학가와 강남 지역에는 깔끔한 인테리어와 고급스러운 시설로 무장한 당구장이 크게 늘고 있다. 기존 당구와 달리 포켓볼과 국제규격의 스리쿠션용 당구대를 갖춘 곳이 급격히 늘었다. 젊은이들의 취향을 감안, 생과일 주스나 에스프레소 등 고급 음료를 제공하며 카페식 분위기를 연출한 당구장도 많다. 이런 추세에 따라 대학당구연맹은 매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스리쿠션’과 ‘포켓볼’ 리그전을 개최하고 있다.

‘패싸움 공간’ 이미지 벗으려 법정투쟁도
당구 중흥의 뒤에는 관련기관들의 노력도 적잖은 기여를 했다. 이들이 역점을 둔 건 당구에 덧씌워진 나쁜 이미지를 벗기는 일이었다. 당구장이라면 껄렁한 건달들이 모여서 패싸움이나 하는 곳이라는 선입견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한당구연맹은 2004년 한 가수의 뮤직비디오에서 당구장 폭력 장면이 나오자 이에 대한 방영금지 가처분신청까지 낸다. 문제가 된 건 당구장 내에서 성희롱과 패싸움이 일어나는 1분20여 초짜리 장면이었다. 결국 문제의 장면을 대폭 줄이기로 합의가 이뤄져 가처분신청은 취하됐다. 연맹은 당구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한편 당구장 내 금연·금주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당구장 건전화 운동의 일환이다.

현재 한국의 당구계는 중흥기에 접어들었다. 동호인 증가와 함께 인식이 변화하면서 정식 스포츠로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빼어난 용모의 선수들이 대중적 스타로 떠오른 것도 중흥의 배경이 됐다. 아울러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까지 탄생해 도움을 줬다. 몇몇 케이블TV가 당구 게임을 중계하면서 일반인들 의 관심도 크게 늘었다.

특히 오는 9월 2일부터 경기도 구리실내체육관에서 ‘세계 스리쿠션당구 월드컵’이 일주일 일정으로 열린다. 이번 대회에는 20개국, 128명의 선수들이 참여한다. 대한당구연맹 나근주 과장은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당구 중흥의 좋은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물론 당구가 명실상부한 국민 스포츠로 발전하는 데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당구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강하다. 또 선수층이 늘긴 했지만 다른 종목에 비하면 여전히 얇은 편이다. 연맹에 등록한 선수는 1000여 명. 이 중 전업 선수는 극히 드물다. 상금이 걸린 대회도 많지 않을뿐더러 액수도 골프 등에 비하면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호인들이 꾸준히 늘고 저변도 넓어지고 있어 당구 르네상스는 상당 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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