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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형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70년대야말로 우리의 숙원인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공산주의세력과 유혈적 격전을 전개해야할 시기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치축을 구축, 국내정치의 안정을 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11월12일 우석대에서의 연설)-.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씨의 안보관이자 정치관이기도 하다.
김씨는 63년7월 민정이양직전 김재춘씨의 후임으로 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 지난 10월22일 사임했다.
「정치적 안정」을 기조로 하고있는 그의 안보관은 그로 하여금 60년대 정치의 핵에 깊숙이 개입케 했다.
그의 행동반경에 따라 그 진폭을 달리할 만큼 영향력이 컸었으며 여야의 정치적 쟁점이되기도 했다.
50넌대의 6·25동란이후 60년대 초반의 4·19학생의거와 5·16군사혁명 등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만 해도 북괴의 무력도발에 대한 안정보장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못된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북괴는 잇단 무장공비남파, 「푸에블로」미정보수집함납치, EC·121미정찰기격추 등 내외적으로 무력도발을 감행, 위기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북괴도발에 대처하는 안정보장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으며 안보논의의 추이는 『강력한 「리더쉽」에 의한 정치적 안정으로 북괴도발을 극복해야한다』는 김씨의 안보관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준 것 같다. 『최상의 안보는 정치적 안정으로 잘사는길』이라고 스스로 정의했듯이 그의 안정관은 군사외교적 측면보다는 국내의 현실정치에 더역점을 두었으며 그래서 그는 안보문제와 정치문제를 연결했다. 반공안보를 위한 정치안정은 강력한 영도력에서만 가능하다는 논리에서 김씨는 개헌추진의 주요 「멤버」로 나서게된 것 같다. 여야당을 막론하고 개헌추진세력과 반대세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이 일거수일투족은 개헌정국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가 물러난 이유만 해도 개헌추진과정에서의 정보조직동원으로 유발된 야당의 호된 공격을 둔화시키기 위한 다분히 정치적인 것으로 보는 이가 있었다.
그의 고유임무였던 대공사찰에 있어서는 동백림간첩사건, 위장간첩 이수근체포, 김규남간첩사건, 제주도·임자도·흑산도 등 무장간첩사건 등을 해결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한 대공체제를 갖추었다.
『북괴간첩침투를 정확한 판단과 대비로 분쇄했다』고 그 자신도 자부하고있다. 대공사찰이라는 고유기능의 향상은 상대적으로 북괴의 대남공작진영을 교란시키는 효과도 가져왔다.
6년 이상 북괴의 대남공작책이었던 이효순이 물러났고 그 후임이었던 허봉학도 68년에 대남공작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숙청 당한 것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그의역할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어쨌든 중앙정보부의 대명사인 「남산」이리면 여야양편에 위압감을 주었으며 그 때문에야당은 간헐적으로 그에게 공세를 취했다.
야당에서도 그에 대한 불만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 최초의 노출은 지난 7월에 있었던 공화당의원총회. 몇몇 의원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나 반공에는 나도 누구보다 뒤지지 앓는다』면서 김씨의 퇴진을 요구했다.
김씨가 6년 동안 도사린「남산」에서 물러앉게 된 것은 반드시 야당의 공세나 여당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쨌든 정치풍토에 어떤 변화가 기대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일단 퇴진한 그를 두고 반공전략의 조직화와 정권안정에 끼친 그의 공헌을 늪이 평가하는 이가 많다. <박석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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