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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탄생100주년맞아…무남독녀「카트린·지드」여사 회견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11월22일은「프랑스」작가「앙드레·지드」 가 탄생한1백주년이 되는날이다. 이날을 기념하기위해「프랑스」는 물론「유럽」의 여러나라와 미국·「캐나다」·호주에서까지도 각종기념전시회·토론회 「라디오」 TV방송및신문·잡지의 특집이 계속되고있다.

<첫부인이 낳은 딸>
그의 문학과 사상은 너무나도 널리알려진반면 그의인간은 여전히 하나의수수께끼로 남겨져있다.
기자는 「지드」의 유일한 후손인 무남독녀 「카트린·지드」 여사를찾아 「지드」의 세계관, 그리고 그의사생활을 중심으로한 인간성을 알아보기로 했다. 흔히 「앙드레·지드」가 외사촌누이「마들렌·롱도」 와 곁혼했으나 두사람의 결혼은 『결백한결혼』으로 알려져왔고 또 실제로 두사람사이엔 후손이없었다.
그러나「지드」는 어느또하나의 여인에게서 낳은딸을 갖고있었다. 그래서 그런지「카트린」여사의 존재는 세상에 잘알려져있지않고 또 자신도 만인앞에 썩 나타나길 좋아하지않는 것 같다. 그래서「카트린」 여사는 「파리」 지식가로 불리는 「셍·제르멩·데프레」의 어느 5층「아파트」에서 조용히 살고있다.
올해 46세의 「카트린」 여사는 나이보다는 젊어보였다.「카트린」 여사는 의사인「랑베르」씨와 결혼 하였으나 오래전에 이혼, 「랑베르」씨는 미국으로 가고 아들하나 딸 셋을데리고 살고있는데 큰딸이 영국으로 시집가고 지금은「파리」대학서 도시계획학을 공부하는아들, 간호원인 둘째딸과 중학을 다니는 세째딸만 데리고 산다.

<남불의 명문출신>
1869년 「앙드레·지드」가 탄생할때의 가정분위기부터 물었다. 『아버님 「앙드레·지드」는 남불출신의법대교수인 아버지와 「노르망디」대 「부르좌」 출신인 어머니사이에 「파리」에서났습니다. 지금은 존재하지않은 굄장한 「부르좌」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지요』라고 여사는 말문을 열었다.
기록에 의하면 어릴때의「지드」는 대단한 신경질이며 변덕스럽고 괴팩한데다 나쁜습관이 있어 「알자스」학교서 쫓겨났다고하는데 『그나쁜습관이란 어떤것이었느냐』 고 묻자「카트린」여사는 서슴지 않고 『친구들과 잘 싸웠대요. 그래서 학교서 쫓겨나긴 했지만, 얼마후 다시 복학이허가 되었데요』라고 말하며 아버지 「지드」를 변명했다.『두살 연하인 외사촌 누이에게 반해 15살때부터 「지드」는 사랑에 빠져 24살때 결혼 했는데 부인이된「마들렌드」 여사완 일생을마음 속으로 사랑하면서도「순결」을 지켰다고 알려져있는데 그이유는 무엇이었던가요』라고 질문을 던지자 「지드」 여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자기를 낳지않은)관계는 세상이 다 아는사실이라고 말하며 곤란하다는 둣 『글쎄, 「플라토닉」 한 사랑이라서 그랬나 보죠』라고 말끝을 흐려버렸다.
약혼후 「지드」는 곧 혼자서 「알제리」 여행을 떠났다는데...
『아버지는 그때 폐결핵에 걸려 있었어요. 요양과 여행을 떠난 것이죠. 그런데 아버지는 「알제리」여행으로 아주 좋은 경험을했고, 그 경험은 그의 작가생활이나 그의인생에 아주 중요한경험이었어요.』
「지드」 의초기문학활동은 곤란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이유는?
『사실입니다. 처음엔 책이 잘 나가지 않았대요. 겨우 수십부를 자비출판했을뿐이지만, NRF (프랑스신잡지)를 창간하고 소설「바티칸의 지하실」이 성공한후부턴 괜찮게됐나봐요.』
그는 신교사가정에서태어나서 일찍 종교를 떠났다고하는데 죽을때도 종교에 귀의하지 않았나요?
『너무 철저한 신교사집안서 자랐으나 퍽 어릴때부터 교회엔 나가지않았대요. 인간 종교 도덕등 기성가치를 거부한분이라 종교에대한 회의는 일찍부터 일어났고 「클로델」을 비롯한많은친구들이「가톨릭」으로 들고 또 권유도 많았지만 그는 죽을때까지 비신자로 있었읍니다.』

<혼잘땐 피아노와>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아버지의 작품은?
「난 아이러니컬」 한「지드」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알의 밀이 죽지않으면」을 가장 즐겨 읽습니다.』
현시점에서 「지드」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작가의 명성이 떨어지기는 쉬운 일입니다. 특히 세대가 완전히 달라져 지금은 19세기식 「부르좌」의 산물을 싫어하지않습니까? 최근 어느신문사 조사에 의하면 젊은이들은「지드」 의 가치에대해 회의를 품고 있다고도 하지만, 기성가치를 재검토하게한 「지드」의 「근심하게하는자」 의 역은 지금에도 변함이 없어요. 특히 그의 작품이계속 많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하지않을까요?』
그는 창작을 하지않을때 집에서 무얼 했습니까?
『「피아노」 를 무척 좋아해서 「쇼팽」 의 작품을 항상 연주했읍니다. 그러나 친구나 손님 앞에선 절대로「피아노」 앞에 앉지를 앉았어요.』

<노벨상받고 기쁨>
담배나 술은 많이 했는지?
『담배는 많이 피웠으나 술은 건강때문인지 안하셨어요.』
여행을 많이 했는데 함께 아버지를 따라 여행한일이 있는가?
『남불이나 「제네바」에 아버지와 여행을 함께 다녔어요.혼자 여행서 돌아오실땐 선물도 사오셨고요. 냉정하고 괴팩한 「지드」로 알려져 있지만, 가정에선 따뜻하고 섬세한면도 있었어요.』
아버지와 살땐 행복하다고 생각하셨나요?
『그렇지 않다고 말할수없쟎아요?』
1947년「지드」는 노벨상을 받았는데, 그때 좋아하시던가요?
『상자체에 대한 애착보단 자신의 작가의 지위를 인정받은데 대한 기쁨이 컸던것 같습니다.』
처음 태도와는 달리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준 「지드」 여사와 한시간 동안의대화를 마치고 책으로 가득찬 여사의 거실을 나오면서 한국의 인삼차 한상자를 전했다. 【파리-장덕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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