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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신주류로 뜬다] 4. 좌절과 전향, 시민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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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두 번이나 만났다. 그런데 김일성은 정작 주체사상을 잘 몰랐다. 입으로는 '주체'를 이야기했지만 그의 말에는 주체사상이 담겨 있지 않았다. 북한의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학생 운동권에 주체사상을 처음 접목시킨 '강철서신'의 필자 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씨는 이런 말을 남기고 1995년 전향했다. 그는 남파 간첩과 접선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남한 주사파의 거물이었다. '친북(親北)'의 상징이었던 金씨는 이후 탄압받는 북한 민중을 구출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반북(反北)론'을 펼쳤다.

*** "김일성 만났더니 '주체'몰라"

"나는 이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깃발을 내린다. 대신 생명의 깃발을 높이 올린다."

시집 '노동의 새벽'을 쓰고 법정에서 "내 직업은 혁명가"라고 했던 박노해(본명 박기평)씨도 돌아섰다. 그는 "사회주의 포기는 견디기 힘든 자기부정이며 참담한 용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급진주의보다 개량주의가 오히려 적절한 대안"이라고 고백했다. 경주교도소에서 朴씨가 발견한 화두는 '적색'이 아니라 '녹색'이었다.

운동권에 90년대는 '좌절과 전향'의 시기였다.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혁명을 부정하고 있었다. 바람은 외부에서 불어닥쳤다. 러시아가 91년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포기, 70여년에 걸친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자인하며 무너져내렸다.

89년 중국 천안문사태도 충격이었다. TV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향해 탱크를 돌진시키는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운동권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든 칼(사회주의 혁명)이 잘못된 칼임을 깨닫자 운동권은 당황했고 방황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의 임종석 민주당 의원은 "사회주의 몰락을 부정했던 한 후배는 러시아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서야 현실을 받아들일 정도였다"고 당시의 충격을 전한다.

군사독재 시절 운동권에 동조하던 시민들도 '주사파''사회주의 혁명'에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92년 3월 총선에선 진보정당이 좌초했다.

'진보 진영의 정치세력화'를 내건 민중당에 대한 지지율은 법적 정당 유지 조건에도 못미치는 1.5%에 그쳤다. 재야 운동권의 대부인 이우재(상임대표).장기표(정책위의장).이재오(사무총장)씨 등 민중당 수뇌부는 결국 당 해체를 선언했다.

대학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시위가 뚝 끊기면서 정상 수업이 이뤄지고 출석률은 높아졌다. 학술.이념 서클은 신입회원을 받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비운동권 출신의 총학생회장도 갈수록 늘어났다. 개발 시대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난 대부분의 대학생은 혁명이론과 화염병을 거부했다.

전대협에 이어 93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출범했지만 '화려한 시절'은 이미 가고 있었다. 이념적 토대가 무너진 운동권은 '그래도 혁명이냐, 아니면 체제 내 개혁이냐'는 고민을 거듭했다.

혁명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도소를 택했다. 대표적 인물이 김영환씨의 대학동기이자 '남한 주사파'의 쌍벽이던 하영옥씨. 河씨는 97년 金씨가 '반제(反帝) 청년동맹'을 해체하자 "조선노동당의 정통성을 인정하라. 아니면 무전기와 현지지도원 접촉선을 우리에게 넘기라"며 반발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하던 그는 남파간첩과 독자적으로 접선해 북한으로부터 '광명성 1호'라는 암호명을 받고 지하활동을 하다 붙잡혔다.

河씨는 남파간첩과 함께 99년 월북을 시도하려 했으나 그를 태우고 갈 반잠수정이 사전에 한국군에 의해 격침되는 바람에 북에는 못갔지만 대신 목숨은 건졌다. 그는 8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90년대는 그러나 혁명이념의 빛이 바랜 자리에 새로운 사회운동이 싹튼 시기였다. 특히 89년에 출범한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혁명 대신 개혁을 택한 경실련은 결국 성공했고, 새로운 시민운동 시대를 열었다.

경실련은 초기에 정부.재야 양쪽에서 협공받았다. 당시 경실련 사무총장이던 서경석 목사는 "재야는 우리를 '개량주의'라고 압박했고, 정부는 '또 다른 반정부 단체'라고 몰아세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투쟁을 위한 투쟁을 접고, 모든 비판에 대안을 제시하자'는 경실련의 온건노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경실련은 서경석 목사 그룹과 서울대 변형윤 교수 그룹이 결합해 출발했다.

邊교수의 호를 딴 '학현 그룹'에서 강철규(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이근식(서울시립대 경영대학원장).김태동(금융통화위원회 위원).윤원배(숙명여대 교수).이진순(숭실대 교수)씨 등 소장파 경제학자들이 경실련에 들어갔다.

황인철.박인제.정성철씨 등 변호사 그룹도 가세, 금융실명제.토지 공개념.한국은행 독립 등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90년대 사회운동권에선 '좌(左) 참여, 우(右) 경실'이란 말이 있었다. 경실련이 민중운동 진영을 비판한 반면, 94년 출범한 참여연대는 민중운동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쪽이었다. 참여연대는 경실련을 '보수적이고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라며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크게 두 그룹이 손잡고 결성했다. 박원순.조용환.안경환.차병직.한인섭.박은정씨 등 인권변호사.법학자 그룹과, 조희연.김호기.손혁재.박호성.김동춘씨 등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다.

'경제감시'에 치중하던 경실련과 달리 참여연대는 '권력감시'에 무게를 실었다. 대전 법조비리 사건 때 현직 판사와 검사까지 고발하는 등 워낙 고발을 자주 해 '고발연대'로 불리기도 했다.

참여연대는 97년 외환위기 사태와 함께 사회운동의 중심단체로 부각됐다. 줄기차게 주장해온 재벌개혁.부정부패.복지 등이 사회 현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98년에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를 비롯해 하승수(변호사.회계사).김균(고려대 교수).조원희(국민대 교수)씨 등이 가세, 소액주주운동 등에 주력했다.

시민운동은 90년대 들어 빠르게 분화되고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 등이 조직됐다.

환경운동연합은 93년 8개 환경운동단체가 통합하면서 출범했고, 녹색연합은 94년 교수.법조인 등 전문가 그룹이 참여하며 결성됐다. 이 단체들에는 학생운동권 출신이 거의 없고 다양한 분야에서 자리잡은 젊은 인력들이 대부분이다.

이밖에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분야별로 각개약진한 시민운동은 이제 각종 사회권력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성장했다.

*** 의약분업 주도 … 大亂 불러

그러나 시민단체들에 대한 견제와 비판도 동시에 거세졌다. 소수 정권이었던 DJ 정권이 시민단체의 지지를 업고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홍위병'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는 등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시민단체들에 대한 정체성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의료개혁을 추진하면서 DJ조차 관계장관에게 "정부는 뭐하는 곳이냐"고 화를 낼 정도로 정부가 시민단체에 휘둘린 끝에 의료대란을 부르고 만 것은 정부와 시민단체의 역할이 뒤바뀐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특별취재팀>
김창호 선임전문위원, 이철호 차장, 백성호.이가영 기자

<사진 설명 전문>
1990년대에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환경·경제·여성·문화·의료·법조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참여’를 내건 시민운동이 활발해졌다. ‘화장실문화 시민운동’도 생겼다. 이들 시민단체들끼리도 연대해 시위를 벌이는 것이 일반화했다. 사진은 99년 말 시민단체들이 벌인 ‘신자유주의·세계화 반대’ 시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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