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는 남측에 "백수건달들" … 개성회담 결렬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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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제6차 개성공단 남북당국실무회담이 끝난 뒤 박철수 북측 단장의 기자회견을 막으려는 남측 대표단(가운데)이 북측 관계자들에게 제지당하고 있다. [개성=사진공동취재단]

“이런 경우가 어디 있나. 우리한테 얘기는 해야지.”(남측 지원요원)

 “우리 자유다.”(북측 보장성원)

 25일 오후 5시23분. 개성공단 내 종합지원센터 4층 남측 기자실에선 험악한 분위기 속에 남북회담 관계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여졌다. 박철수 단장과 10여 명의 북측 관계자가 예고 없이 기자실에 들이닥치면서다. 사전 협의 없이 상대 측 언론과 접촉하는 건 남북회담 사상 초유의 일이다. 현장에 있던 공동취재단 기자들이 직통전화로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 기자실에 “북측이 난입했다”고 급히 알려올 정도로 상황이 긴박했다.

북측은 우리 측 관계자들이 대응하지 못하게 13층 회담장에서 기자실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4대를 모두 움직이지 못하게 장악한 뒤 행동을 개시했다. 북측에 들어간 우리 대표단은 대표 3명과 지원요원 21명, 기자단 17명. 지원요원에는 회담 전략과 운용을 담당하는 당국자 외에 회담장 안전·보안을 위한 관계 당국 직원들도 포함됐으나 이들은 박 단장 등이 프레스센터에 나타난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박 단장은 준비해온 A4 용지 3쪽 분량의 기자회견문을 서둘러 읽은 뒤 비공개가 관행인 북측 회담의 제안이 담긴 자료를 나눠줬다. 10분 정도 지나 남측 관계자들이 달려와 제지하자 박 단장은 남측 대표단을 겨냥해 “백수건달들”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6일 시작된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당국회담이 사실상 결렬로 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날 회담이 순조롭지 못할 것이란 점은 남측 대표단이 회담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예고됐다. 북측 박 단장은 우리 대표단이 도착할 때까지도 회담장 문 앞에 나와 있지 않았다. 김기웅 대표가 차량에서 내리지 않고 버티자 그제야 영접을 위해 모습을 보였다.

 북측이 공개한 3차, 4차, 6차 회담의 북측 합의서 초안(북측 제안을 담은 문건)을 살펴보면 북한이 재발 방지나 국제화에 대한 성의를 보이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북측은 지난 15일 3차 회담에서 “북과 남은 개성공업지구 중단과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며…정상운영에 저해를 주는 정치적·군사적 행위를 일체 하지 않는다”는 문안을 제시했다. 4월 초 5만3000여 명의 북측 근로자 일방 철수로 빚어진 중단 사태의 책임을 남북 쌍방과실로 몰아가려 한 것이다.

 우리 측이 문제를 제기하자 북측은 17일 4차회담에서 수정안을 들고 나왔지만 오히려 후퇴한 것이었다.

 이날 회담에서 남측의 전략부재도 드러났다. 오전 10시부터 1시간30여 분 열린 전체회의에서 김기웅 수석대표가 김정일의 교시를 인용한 북측 단장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실책도 범했다. 박 단장은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말을 거론한 뒤 “이런 입장과 자세를 가지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수석대표는 “말씀하신 것처럼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잘 이해하고 더 멀리 세계를 보면서 미래로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자. 좋은 말씀이라 생각한다”고 호응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전 언급을 회담장에 들고나온 북측 단장에게 말려드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이를 실시간 중계시스템으로 모니터한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 상황실과 국정원 평가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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