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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출세가도|현직대통령은 재선안된다.는 필리핀의 신화 깨뜨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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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0년전 「루손」북쪽 「코르딜하스」 계곡에서 일군에 쫓기던 작달만한 키의 항일유대원이 「필리핀」의 영광을 외치는 70년대의 기수로 자임하며 3천3백만「필리핀」국민의 「리더」로뽑혔다. 『현직대통령은 당선되지 않는다』는 섬나라의 거친 정치신화를 깨고 재선된 「페르디난드·마르코스」대통령(52)은 『「게슈타포」체제의 독재와 부패의 왕국이다』고 물고 늘어진 「오스메나」야당후보의 필사의 추격을 1백만 표차의 승으로 대답해었다. 하지만 압승에의 길은 「코르딜하스」계곡의 유전만큼이나 험준했다. 흙탕전으로 뒤법벅이된 「금패논쟁」은 가시 돋친 인신헐뜯기로 시종했다. 사망 56명이란 사상최악의 선거분위기는 막판에 「마르코스」가 무장선거운동원에 대한 사살령을 국립경찰에 내렸을 정도로 피로 얼룩졌다. 『승리는 눈물과 더불어』라는 「마르코스」전기의 「타이틀」처럼 「마르코스」는 이긴것이다. 패배를 모르는 「마르코스」의 생애는 눈물과 피의 역정이었다. 풍운아의 도정은 「마르코스」 살인죄로 몰려 시골법정에 설때부터 시작됐다.
18세로 「필리핀」대학법과학생 「마르코스」는 부친 「마리아노·마르코스」를 누르고 하원의원에 당선된 아버지의 정적 「말룬다산」을 쏘아죽인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1심에서 4년형을 받은 그는 면벽4년을 법률책과 벗하며 기회를 노렸다. 22세에 「마르코스」는 사법고시에 응시, 고시사상 최고득점으로 장원, 변호사의 자격을 얻었으나 피고의 몸이라 그저 법학도로서 면도날같은 법리논을 펴 무죄선고를 받았다.

<최연소 변호사로>
23세에 변호사협회에 가입함으로써 최년소 변호사가된 그는 언론인필화변론등 16건의 「센세이셔널」한 형사사건을 처리했다. 진주호에서 치솟은 「마르코스」를 법복대신 사복으로 갈아입혔다. ROTC출신인 그는 41년 일군의 「필리핀」진주에 따라 「필리핀」21사면정보장교로 입대했다. 유명한 「바탄」반도격전에서 수세에 몰린 미-북연합군의 퇴로를 트기위해 「마르코스」소위는 10명의 특공대를 조직, 적진을 꿰뚫어 아군을 구출하기도 했다. 『죽음의「바탄」행진』이 그것이었다.
「산티아고」에서 일군의 포로가된 그는 「오도넬」수용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극적인 탈출에 성공, 「게손」대통령부대에 합류해 끈질긴 저항을 계속했다. 「베상」전편에선 「필리핀」주둔일군총사령관 「야마시다」생포하는데 공을 세우는등 그의 무위은 미국의 「오디·머피」와 비길만큼 찬연했다. 이같은 전공으로 「마르코스」는 종전과함께 미최고훈장을 「맥아더」원수가 손수 달아주는등 대소27개의 훈장이 그의 가슴을 꽉채웠다. 다섯번이나 부상을 한 그는 2차대전중 「필리핀」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떠받들어 쉽게 정치무대에 오를수있었다.

<30세에 대통령보좌>
47년에 「마누엘·로하스」초대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30세에 대통령보좌관이됐다. 그해 전국용사로 처음 미국땅을 밟기도했다. 아버지 「마르코스」의 선거구인 북「루손」 「일로코스」2구에서 하원의원에 출마한 그는 32세 최년소의원으로 당선. 12년동안 내리 3선의 관녹을 누리면서 야당원내총무, 상공분과위원장등을 지냈다.
59년엔 상원에 진출, 최고득점으로 당선된 뒤 주택·관개·식량문제 입법에 주력했다.
특히 토지개혁법통과와 노조의 「마그나·카르타」제정자로서 폭넓은 그의 원내활동은 63년 그를 상원위원에 앉게했다. 상·하양원18년간의 원생활에서 그는 「오타와」에서 열린「콜롬보」계획회의에 「필리핀」대표로 참가, 「필리핀」을 정회원국으로 가입시켰고 네번이나 「유엔」대표로 파견되는등 외교활약도 많았다.
「말라카낭」궁을 향한 「마르코스」의 야심은 61년5대 대통령선거에서 자전당의 「보스닉마카마갈」(부통령)과 후보지명 경쟁에 나섬으로써 싹텄다. 「마르코스」는 「마카파갈」이 1선에만 그친다는 「신사협정」을 다짐받고 후보를 양보, 선거사무장으로 「마카파갈」을 밀어 당선시켰다.

<설득력있는 능변>
그러나 65년 「마카파갈」이 신사협정을 깨고 2선에 나서자 「마르코스」는 자유당을 박차고 뛰쳐나와 후보물색에 부심하고 있던 국민당(Nacionalists Party)에 영인, 지난날의 동지「마카파갈」과 겨뤄 65만표차로 그를 누르고 「말라카낭」궁의 주인이됐다. 행운의 출세「하이웨이」를 달려온 「마르코스」는 문무를 고루갖춘 그의 질긴의지가 오늘의 영광을 안겨다주었지만 민족주의색채를 띠고 「필리핀」의 영광을 부르짖는 그의 설득력있는 능변이 『젊은 「필리핀」의 마음』을 움직인것이다.
『젊은 「필리핀」의마음』을 잡는데 「이멜다」(38)부인의 매력은 『풀러스·알파』효과를냈다. 화사한 「티노스」를 입은 「이멜다」부인은 미모와 잘닦인 정치적 「센스」를 섬나라 구석구석에까지 누벼 「마르코스」의 복음을 전파했다. 미국의 오탠영향력 아래서 자란 「필리핀」의 정치풍토는 미국정치의 복사판같은 것이어서 「마르코스」부부의 정치행각은 「케네디」형의 기수「이미지」부각작전에 맞아들었다.

<부인은 미스·필리핀>
교육학을 공부한 「이델다」부인은 대학땐 「캠퍼스·퀸」, 53년엔 「미스·마닐라」, 54년엔 「미스·필리핀」에 뽑혀 부군의 출세가도에 지지않케 미의 정상을 디뎌올라갔다. 「아시아」의 「재키」라는 신문평을 보고 『「미시즈·마르코스」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항변(?)할만큼 정치「센스」가있어 24억원짜리 문화「센터」의 기금을 혼자거두어들이는 맹렬 「퍼스트·레이디」이기도한데 이번 선거유세때도 남편의 열변이 끝나면 단상에 올라「센티맨틀」한 민요를 불러 표를 긁어모았다. 「이멜다」부인의 가계는 본래 굵은 정치적 배경을 지녔고 대사지쟁등 행정가가 나온 명문출신.
「마르코스」를 헐뜯는 쪽은 그가 「부패의 왕초」며 빈부의 차가 극심한 「필리핀」사회를 말해주는 본보기라고 호되게 쏘아붙이고 있다. 「마르코스」는 「마닐라」시교외에 대지3백평, 건평1백평 가량의 아담한 「스페인」풍의 저댁을 가지고있다.

<사격엔 「챔피언쉽」>
그러나 그의정적들은 정치계보와 밀착된 밀수조직이 「마르코스」와 선이닿아 경제를 좀먹고 있다고 헐뜯었다. 「마르코스」는 난폭자며 살인혐의자라는 야당후보의 인신공지에 맞서 『대학때 저지른 일, 그것도 2차대전전의 묵은 사건을 물고늘어진다』고 응수했다.
정치폭력과 극수관계를 갖고있다는 「마르코스」는 권투·수영·「레슬링」을 즐겼고 특히 「골프」「핸디」가 「싱글」인 「프로」급이며 사격은 「챔피언」1, 그의 서재엔 50여종의 장·단총이 그의 명사솜씨를 일러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학창시절엔 학술웅변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독차지했고 군사과학상까지탔다. 「바리톤」인 노래솜씨는 「이멜다」부인의 「메조·소프라노」와 「듀엣」을 서슴치 않고 불러 군중들을 열광케했다. <최규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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