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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항공기 사고 소식에 허무감 밀려온다는 60대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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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Q 사업을 하는 60대 초반 남자입니다. 나름 회사를 열심히 키워 이제 여유가 좀 생겼습니다. 애들도 커서 다 독립했고요. 요즘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공허함과 허무감이 몰려옵니다. 특히 이번 미 샌프란시스코 항공 사고와 같은 재해 사건을 접하면 허무감이 더 세게 밀려듭니다. 갱년기 우울증이라는 게 있다는데 그 증상인가요. 이제 먹고살 만하니 치열함이 없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 자책하기도 하지만 허무감은 도통 없어지지 않네요. 마음의 허무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A 우울의 반대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울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모순이고 거짓일까요.

 행복 강박의 시대입니다.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매일 360도 우리를 감쌉니다.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행복은 남의 일 같습니다. 행복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으니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노력이 부족했다고, 안일하게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울장애는 꼭 치료해야 하는 병입니다. 하지만 우울하다는 느낌 자체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정상입니다. 현대인은 과거에 비할 수 없는 탁월한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5000년 전 조상이나 우리나 실존적 지식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서 탄생했으며 삶이 끝나면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궁금증에 대해선 아무런 과학적 대답을 못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성 시스템엔 이런 실존적 허무가 주는 자연스러운 우울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행복의 정의를 ‘긍정적인 느낌’이라고 정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어찌 보면 우울한 느낌은 성숙의 신호이기도 한데 이걸 병이라며 불편해하고 도망치려 하면 오히려 더 불행해집니다.

 어린아이들은 잘 울기는 하지만 우울해하지는 않습니다. 현재에만 집중하기 때문이죠. 우울이란 과거에 대한 후회,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됩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단순해서 현재의 가치에만 충실하기 때문에 우울하지 않습니다.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우리는 시야가 넓어집니다. 넓은 시야는 과거와 미래를 다 같이 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울함을 동반합니다.

 비즈니스는 이성이 주도하는 영역입니다. 피곤하지만 내 계획대로 성취하면 행복합니다. 물론 경제적 이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심리가 크게 작용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조정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에겐 존재합니다.

 자리를 물려주고 이선으로 물러나면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시야가 넓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삶의 본질적인 허무는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 열심히 산 게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특히 자연재해 같은 피할 수 없는 사건·사고 소식을 들으면 무기력감과 허무를 더 느낍니다.

 여러분, 세상은 억울한 일, 행복하지 않은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행복한 느낌 그 자체가 행복의 정의는 될 수 없습니다.

 17세기 유럽 귀족 사이에 해골 인테리어가 유행했습니다. 인간 한계를 상징하는 해골이나 모래시계 같은 소재의 그림으로 집을 꾸민 겁니다. 이른바 바니타스 예술(vanitas art)인데, 바니타스란 인생무상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당시 유럽 귀족이라면 충분한 부나 명예를 누렸을 텐데 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그림을 즐겼을까요. 혹시 부와 권력을 가졌기에 본질적인 허무를 더 느꼈던 걸까요.

 우리는 기분전환이라는 심리적 테크닉을 자주 씁니다. ‘회식으로 기분 전환하자’거나 ‘스트레스 받는데 영화 보며 기분 전환하자’고들 하죠. 여가 생활 상당 부분이 이처럼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 행복감을 얻고자 하는 전환(diversion) 활동입니다. 나이 들수록 회식이 재미없다거나 놀 때는 좋은데 아침에 일어나면 더 허전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분전환은 때로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감정을 통제하는 거라 결국은 더 힘들어집니다. 또 ‘삶이 치열하지 않아 허무한 것’이라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 역시 일시적인 효과는 있으나 본질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바로 겸손이라는 마인드 트레이닝이 허무를 다루는 데 효과적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본질적 가치와 사회경제적 가치를 분리하는 겁니다. 반대로 자신의 가치를 사회경제적 가치와 동일시하는 건 속물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성취는 아름답지만 속물 가치관에 빠지면 허무로 인한 분노와 슬픔을 달래기 더 힘듭니다.

 겸손은 소탈한 감성입니다. 바로 이 소탈한 마음이 허무에 대한 최상의 솔루션(해법)입니다. 흔히 ‘사람이 욕심이 없고 마음이 소탈하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소탈하면 스트레스에 휘둘리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또 소탈하기에 자신의 자본주의적 성취도 더 감사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또 소탈하기에 주변엔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만약 성공했는데 소탈한 감성까지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얄미울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유럽의 바니타스 예술은 겸손과 소탈함을 유지하기 위한 트레이닝 도구였습니다. 성취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시간을 상징하는 모래시계를 보며 ‘공수래공수거,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도 이해하고, 남 미워 말고 가진 것 소중하게 여기며 소탈하게 살자’라 했던 게 아닐까요.

 허무에서 도망치기보다 이 또한 삶의 소중한 감성 자산이라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요. 예술 작품 대부분이 삶의 고통과 허무를 다루는 것도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위로하려는 것입니다. 흥겨운 놀이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칙칙하고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예술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그리고 허름한 식당에서 친구와 소탈한 우정을 나누는 것, 이게 허무에 대한 촉촉한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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