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염치'엔 '불구'가 아닌 '불고'가 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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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살다 보면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부탁합니다” “너무 급해서 체면 불구하고 돈을 좀 빌리러 왔습니다”와 같이 사정을 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미안함과 쑥스러움을 나타낼 때 이처럼 ‘염치 불구하고’ ‘체면 불구하고’와 같은 표현을 종종 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염치 불고하고’ ‘체면 불고하고’라고 써야 바르다.

 “몸살에도 불구하고 출근했다” “분양가를 인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분양이 속출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등에서처럼 ‘~에도’ ‘~음에도’ ‘~ㄴ데도’ 등과 어울려 ‘불구하다’가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염치 불구하고’도 맞는 표현이라 생각하기 쉽다.

 ‘염치 불고’는 ‘불고염치(不顧廉恥)’라는 사자성어에서 온 말이다. ‘불고(不顧)’는 ‘아닐 불(不)’과 ‘돌아볼 고(顧)’자로 이루어진 말로 한자 의미 그대로 ‘돌아보지 아니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염치 불고’는 ‘염치를 돌아보지 아니하다’는 의미가 된다. 염치가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므로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이야기하겠다는 완곡한 어법이다.

 ‘불구(不拘)하다’는 ‘아닐 불(不)’에 ‘거리낄/잡을 구(拘)’자가 만나 이루어진 단어로 ‘(무엇에) 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다. 그렇기 때문에 ‘염치 불구하다’는 ‘염치에 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는 의미가 된다.

 “염치 불구하고 부탁 좀 하겠습니다”고 하는 건 오히려 염치가 있든 없든 염치에 얽매이지 않고 부탁 좀 하겠다는 의미가 되므로 이치에 맞지 않다.

 ‘불고하다’는 ‘돌보지 아니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처자식을 불고하고 재산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했다” “그는 병든 노모를 불고하고 사방팔방 돌아다닐 줄만 알았다”와 같이 쓰이기도 한다.

 결례가 될 만한 행위를 하기 전에 미리 양해를 구할 땐 ‘염치 불고’ ‘체면 불고’를 써야 함을 기억하자.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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