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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 처형 400년 만에 ‘저항 아이콘’으로 부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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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호 06면

1 2006년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한 장면. 무정부주의자 ‘V’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독재 정권에 맞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의 한 장면으로, 극중 인물들은 가면 뒤에 숨어 성적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3 오바마와 광대를 합성한 가면으로, 2008년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4 오바마 대통령을 드라큘라에 빗대 표현한 바라큘라(Barakula) 가면. 5 좀비와 오바마 대통령을 합성해 만든 좀바마(Zombama) 가면.

#1 지난달 20일 어나니머스가 2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공개했다. 북한 인공기를 배경으로 한 남성이 등장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그는 “우리는 이미 당신들의 군 관련 문서를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며 6월 25일 북한에 대한 해킹 공격을 예고했다. 실제 6월 25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웹사이트 46개가 일시적으로 마비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면의 사회학

 #2 지난달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태국 방콕은 대정부 시위로 내내 시끄러웠다. 브라질에선 공공요금 인상과 높은 물가에 항의하고, 태국에선 잉락 친나왓 총리를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나라도 다르고 시위의 이유도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은 똑같은 ‘상징’을 내세웠다. 가이 포크스 가면이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국내에서도 낯익다. 2008년 7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협상에 반대해 일어난 촛불집회 때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넷 커뮤니티 ‘DVD 프라임’의 회원 수십 명이 쓰고 나온 가이 포크스 가면의 독특한 모습에 이목이 집중됐다. 널리 퍼진 건 2011년 말 미국 시위의 영향을 받은 ‘아큐파이 여의도’ 시위 때부터다. 아큐파이 월스트리트의 가이 포크스 가면을 그대로 차용해 사용하며 ‘여의도를 점령하라. 금융수탈 1%에 저항하는 99%’ 등의 구호를 외쳤다. 국내 이벤트업체 STUPID 관계자는 “지금도 이 가면은 일주일에 20개 정도씩 꾸준히 나간다”며 “3000종의 물품을 취급하는데 그중에서 인기가 가장 좋다”고 말했다.

 국내는 물론 기존 질서와 권위에 반발하는 세계 곳곳의 현장에서 왜 17세기 영국 사람의 가면이 등장하게 됐을까.

6 가이 포크스. 17세기 영국 제임스 1세를 살해하려다 처형당한 인물이다. 이후 그가 체포된 11월 5일이 되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다 그의 인형을 태우는 풍습이 생겨났다. 영국 불꽃축제 ‘가이 포크스 데이’의 기원이다. ‘놈’ ‘녀석’을 뜻하는 영어 단어 ‘가이(Guy)’는 가이 포크스를 얕잡아보고 조롱하는 데에서 유래했다. 7 2012년 초 ‘여의도를 점령하라’ 시위 참가자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있다. [뉴시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에서 있었던 화약 음모 사건의 주모자다. 당시 국왕 제임스 1세의 가톨릭 탄압 정책에 반발해 궁전을 폭파하려다 실패해 처형당한 이다. 영국이나 그 문화권에서만 알려졌던 가이 포크스는 1982년 발간된 데이비드 로이드의 만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를 계기로 ‘저항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무정부주의자 ‘V’가 독재 정부에 맞서는 내용은 역사와 국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벤데타는 ‘피의 복수’를 뜻한다.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로 유명한 워쇼스키 형제가 2006년 만화 원작을 영화로 제작하고 세계적인 흥행을 하면서, 가이 포크스는 정의의 상징으로 더욱 굳어졌다. 영화 속에서 가면은 ‘국민을 탄압하는 사악한 벌레들을 멸할 도구’로 지칭된다. 만화·영화는 이전까지 제각각이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지금의 모습으로 통일하기도 했다.

“불공평한 사회에 대한 분노의 반작용”
영화 속 ‘저항의 히어로’였던 가이 포크스를 현실로 처음 가져온 것은 어나니머스다. 어나니머스는 2008년 1월 미국의 유사 종교단체 사이언톨로지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가이 포크스 가면을 처음 쓰기 시작했다. 시위 현장에서 자신들의 얼굴을 채증해 가는 사이언톨로지 교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한번 현실로 들어온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갔다. 영상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게 자신의 익명성을 보장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쓰는 건 자연스러웠다. 2011년 미국의 ‘월가 점령’ 시위에 등장하면서부터는 아예 히트상품 반열에 올랐다. 가이 포크스 가면이 배트맨·해리포터 등 전통적인 가면을 제치고 미국 인터넷쇼핑몰 아마존의 2011년 가면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이 가면의 유행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엿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공평하지 않은 사회에 분노가 커지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저항·정의의 상징인 가이 포크스 가면이 선호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이 정의의 상징이 되기 전에는 ‘복면’과 ‘마스크’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대부분의 학생은 복면을 쓴 채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의 채증과 최루가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일부는 흰 마스크 위에 ‘독재정권 물러나라’ ‘군사정권 타도’ 등의 글자를 쓰기도 했다. 2008년에는 일명 ‘마스크 시위 금지법’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촛불 정국으로 집회가 잇따르고 복면 시위자가 염산이 담긴 드링크병을 경찰에 투척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시위가 격해지자 당시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 등은 마스크 및 복면 시위를 금지시키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개정안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 끝에 결국 무산됐다. 80년대 민주화 시위 및 촛불집회에 투입됐던 정보계통의 경찰 관계자는 “마스크나 복면을 쓴 시위자를 보면 ‘오늘 시위가 격해지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마스크 시위대는 보통 시위대보다 과격했다”고 말했다. 이선형(김천대 상담심리학 교수) 연극평론가는 “복면이나 마스크도 가면의 일종이다. 복면을 씀으로써 체계 속의 존재에서 일탈한 나’로 거듭나게 된다”고 말했다.

80년대 시위대의 복면·마스크 업그레이드
가면이 시위 현장에서만 쓰이는 건 아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는 미국 상류층의 은밀한 가면 난교파티가 묘사된다.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은 ‘두 눈을 질끈 감은’이란 뜻으로, 극 중 인물들은 가면 뒤에 숨으면서 성적 욕망이 자유롭게 표출되는 일탈의 과정을 보여준다. 최근 한 건설업자의 별장 성접대 의혹 사건에서도 가면이 등장했다. 지난 10일 강원도의 한 별장에서 유력 인사들에게 성접대를 제공한 혐의로 건설업자 윤중천(52)씨가 구속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 별장에서 전 대통령 등 정치인과 유명 배우들의 가면이 다수 발견됐다고 한다.

 사람들은 왜 가면 뒤로 숨으려 하는 걸까. 흔히 가면은 익명성의 도구로 알려져 있다. 고려대 심리학과 한성열 교수는 “기본적으로 얼굴을 감춘다는 것은 익명성을 원한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숨긴 뒤 자기 속마음을 과감하게 표현하겠다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이선형 연극평론가는 “비난할 대상의 가면을 쓰는 경우에는 조롱·풍자의 의미가 있다. 옛날 마당극에서 지배계층인 양반의 탈을 쓰고 희화화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 함께 쓰는 가면은 서로 간의 정체성을 통일시켜 단결하려는 의도 또한 있다”고 말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충남대 전우영(사회심리학) 교수는 “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나는 이 장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거야’라는 메시지를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원한다”며 “가이 포크스 가면은 자기 정체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8,9 미국 대선을 앞둔 지난해 10월 핼러윈데이 때 유행했던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 롬니(왼쪽)와 민주당 대선 후보 오바마의 가면.

익명성 뒤에 숨어 속마음 과감하게 표현
미국에서 가면은 여론을 미리 알아보는 시금석 역할을 한다. 핼러윈데이(10월 31일) 때 가장 잘 팔리는 가면이 무엇인지에 매번 관심이 쏠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말 미국 대선을 앞두고선 민주당의 오바마 가면과 공화당의 롬니 가면의 판매량이 주목받았다. 미국의 핼러윈 용품점 ‘스피릿 코스튬즈’는 “두 가면의 전체 판매량을 10으로 놓고 봤을 때 오바마 가면이 6대 4로 롬니 가면을 앞섰다”며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 오바마는 전체 선거인단 538명 중 303명(약 56%)을 확보해 재선에 성공했다. 1996년 대선 때부터 지난해 대선까지 다섯 차례의 미국 대선에서 가면 판매량이 많았던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2009년 핼러윈데이엔 기괴한 모습의 오바마 가면이 등장했다. 좀비와 오바마를 합성해 만든 ‘좀바마’ 가면, 오바마와 드라큘라를 합친 ‘바라큘라’ 등이 공화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건강보험 개혁,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으로 오바마 정부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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