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unday] 10년 지각한 압수수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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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호 31면

2004년 여름, 신문사로 제보가 들어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자금으로 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였다. 서울 광진구에 있는 오피스텔이 미술품 보관소다. 오피스텔은 전씨의 처남 이창석씨 명의로 돼 있다.”

 듣자마자 전율이 일었다. 바로 현장에 출동했다. 오피스텔은 굳게 잠겨 있었다. 경비원에 따르면 주인이 오지 않은 지 수개월째라 했다. 열쇠공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경찰에 붙들려갈 게 뻔했다.

 별 수 없이 ‘뻗치기’(무작정 기다리기)에 들어갔다. 사흘쯤 지났을까. 불쌍해 보였는지 경비원이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오피스텔 하수도관이 터져 수리하러 들어가 봤다. 거실에 그림 액자랑 도자기·조각상 같은 게 가득 쌓여 있더라.”

 하지만 그의 증언만으로 기사를 쓰긴 어려웠다. 오피스텔 주인 이씨와 정면승부를 해야 했다. 그가 사는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를 찾았다. 이씨는 기자가 뭘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하다못해 그에게 내용증명 우편을 보냈다. “오피스텔에 있는 미술품, 전씨 비자금으로 샀다고 들었다. 자금 출처를 해명해 보라.” 그날 밤 이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네가 뭔데 남의 재산에 뭐라 하느냐. 자꾸 그러면 밤길 조심하고 다녀야 할 거다.”

 그의 협박은 오히려 미술품 구입 자금이 떳떳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심증만으로 기사를 쓸 순 없었다. 데스크는 “검찰에 알릴 테니 일단 취재를 멈추라”고 했다. 특종은 놓칠망정 은닉 재산은 환수되길 기대했다. 그러나 검찰이 오피스텔을 압수수색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이씨가 미술품들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풍문이 들렸다.

 물론 그땐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전두환 추징법’(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이 없어 전씨 가족 명의의 재산은 추징이 어렵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검찰과 당시 정부가 추징금 미납액 1672억원을 어떻게든 환수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관련 수사는 이어졌어야 했다. 당시 미술계에선 전씨 일가가 막대한 자금으로 작품을 사들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수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들의 미술품 550여 점은 며칠 전에야 실시된 압수수색 뒤 비로소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번엔 검찰과 정부의 환수 의지가 강해 보인다. 하지만 미술품을 산 돈이 전씨의 비자금에서 나왔는지 확인하는 건 10년 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수차례의 돈세탁이 이뤄지고도 남았을 시간이어서다. 그래도 검찰에 부탁하고 싶다. 이번엔 제발 성과를 내달라고 말이다.

 10년 전 전씨 일가 미술품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던 용기 있는 제보자는 누구였을까. 안타깝게도 기자는 모른다. 하지만 제보자뿐 아니라 과거에 순간의 이익 때문에 전씨 일가의 재산 은닉을 도왔을지라도 지금은 후회하는 양식 있는 금융·예술 전문가들이 있을 거라 믿는다. 그들의 진정한 용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이 ‘정의사회’임을 믿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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