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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정상 다시 한번 … 북한 철녀들의 질주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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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AFF 동아시안컵에 참가한 북한 여자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19일 서울 성산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북한 여자팀은 21일 한국과 첫 경기를 갖는다. [김상선 기자]

홍명희·라설주·조윤미·호은별·김은향·김남희·리은향·리예경·라은심·김성희….

 남북이 협력과 화해, 긴장과 갈등 사이를 오가며 팽팽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아 라, 리로 성을 쓰는 것만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어여쁜 이름을 가진 선수들. 2013 EAFF 동아시안컵에 출전하기 위해 18일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에 온 북한 여자 축구 대표팀이다. 북한 여자팀의 방한은 2005년 한국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이후 8년 만이다.

 2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선 남북 여자 축구팀이 자존심을 건 대결을 펼친다. 북한은 이후 일본(25일·화성 종합경기타운), 중국(27일·서울 잠실운동장)과 차례로 경기를 치른 뒤 28일 평양으로 돌아간다. 북한의 목표는 ‘우승’이다. 북한은 FIFA 랭킹 9위로 2008년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1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북한 선수단을 대표해 기자들 앞에 선 김성희(26·평양축구단)는 “우리 팀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 우리 분위기는 경기장에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월드스타 리금숙의 후예들 세대교체

  북한 여자 축구는 ‘월드 스타’ 리금숙(35)이 뛰던 2000년대 황금기를 보냈다. 2001년 아시아여자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북한은 2008년까지 세 차례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1999년 미국 월드컵부터 2011년 독일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월드컵 진출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리금숙 세대가 은퇴하고 설상가상으로 2011년 월드컵에 참가한 선수 5명의 금지 약물 복용 사실이 발각되면서 침체기에 빠졌다. 지금은 대대적인 세대교체 시기다. 이번 동아시안컵 멤버 21명의 선수 중 16명이 90년 이후 태어났다. 기자회견에 나온 북한 대표팀의 맏언니 김성희도 26세에 불과하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에서 첫 골을 터뜨린 북한의 간판스타다. ‘인민 체육인’ 표창을 받았다.

 윤덕여(52) 한국 여자 대표팀 감독은 “김성희와 공격수 윤현희(21·4.25축구단)를 눈여겨볼 만하다.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 움직임이 아주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윤현희가 속한 4.25축구단은 인민군 창건일을 기념해 지은 팀 명칭이다. 여자 대표팀의 절반 가까운 10명이 4.25팀 소속이다. 이 밖에 북한에는 평양 축구단, 압록강, 리명수축구단 등이 있다.

 슛 연습선 남자 선수처럼 파워 넘쳐

“잘했어!” “들어가!” 1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여자 선수들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골키퍼 3명을 제외하고 18명의 선수가 반으로 나뉘어 미니게임을 진행하는데, 서로 “들어가!” “잘했어!” 등을 사납게 외치며 투지 있게 움직였다. 동선이 겹치지 않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인상적이었다. 골키퍼들은 반대편에서 코치가 차주는 공을 막는 연습을 했다.

5분 후 수비수와 공격수가 나뉘어 연습했다. 수비수 4명을 제 위치에 놓고, 다른 선수 2명이 중원 양측 라인 근처에서 공을 길게 차주면 헤딩으로 쳐 내는 연습을 했다. 여자 선수들이 번쩍 뛰어올라 날렵하게 머리로 공을 쳐 내는 게 남자 선수만큼이나 힘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선수들은 다른 편에서 골 결정력을 높이기 위해 슛 연습을 마무리했다.

 선수들은 훈련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코칭 스태프 주문을 잘 따르며 집중력 있는 모습이었다. 훈련이 다 끝나고 마무리 몸 풀기에서도 북한 특유의 단결을 보여줬다. 선수들은 쭉 맞춰 서서 단체로 앞뒤로 손바닥을 치면서 가볍게 왕복 달리기를 했다. “하나, 둘, 셋, 넷…” 구령도 우렁차게 붙였다. 마무리 몸 풀기까지 끝나자 김광민(50) 감독이 선수들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했다. 선수들은 굳은 얼굴로 모두 차렷 자세로 경청했다. 말을 끝낸 감독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에야 선수들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같은 호텔 남북, 마주칠 일은 드물어

  18일 오후 11시50분. 북한 대표팀은 숙소인 서울 상암동 스탠포드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안컵에 참가하는 각국 여자대표팀이 모두 이곳에 머문다. 한국이 5층, 북한은 8층을 사용한다. 남과 북 사이 6층과 7층에는 일본과 중국이 묵는다.

 한 공간이었지만 남북이 마주칠 일은 드물었다. 윤덕여 한국 여자 대표팀 감독은 “밥 먹는 장소도 다르다. 우리와 일본·중국은 2층에서 식사를 하지만 북한은 지하에서 따로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은 19일 오전 8시30분 야채 샐러드와 빵·우유 등으로 간단히 마련된 첫 식사를 마쳤고, 이로부터 4시간 뒤 시작된 점심은 쌀밥과 고기와 튀김 등이 나왔다. 창이 없는 지하를 식당으로 택한 북한 대표팀은 외부 출입을 극히 자제했다. 호텔에 딸린 헬스장·수영장에서 개인 운동을 하는 다른 나라 선수와 달리 북한 선수는 개별 행동도 하지 않았다. 호텔 분위기는 삼엄했다. 사복을 입고 무전기를 찬 경호원과 정부 기관 관계자 30여 명이 곳곳에 배치됐다. 북한은 호텔 측에 “로비에 있는 (한국) 신문을 모두 치워 달라”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광웅 기술분석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외교적으로 미묘한 시기에 한국에 온 소감’을 묻는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우리는 축구라는 이름을 갖고 경기를 하러 온 것이다”라고 답했다.

글=손애성·박소영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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