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취재일기

일본 사회, 헤이트 스피치를 즐기고 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김현기
도쿄 총국장

최근 일본에서 급증하고 있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에 대한 토론회가 9일 도쿄의 외국특파원협회에서 열렸다. 헤이트 스피치란 특정 인종·성·종교 등에 대한 증오 섞인 발언을 말한다. 요즘 도쿄·오사카를 중심으로 번져 가고 있는 일본 우익 세력의 헤이트 스피치는 한국 국민을 정조준하고 있다. 혐한(嫌韓)을 넘어 배한(排韓)의 수준이다.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코리아타운 일대는 거의 매주 주말 헤이트 스피치 세력과 이들에 항의하는 세력의 맞불 시위로 난장판이 되기 일쑤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사실상 이를 방치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 대한 경고가 이날 모임에서 속속 쏟아졌다.

 프랑스 RTL방송의 조엘 르장드르 주일 특파원은 “헤이트 스피치가 계속되는 건 많은 일본인이 너무나도 (그 문제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지난 1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한국이 문제시한 것처럼 극소수의 일본인으로 인해 일본은 정치·경제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곤란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뉴스 사이트 ‘허핑턴 포스트’에 기사를 게재하는 캘리포니아주립대 낸시 스노 교수는 “오사카의 코리아타운인 쓰루하시(鶴橋)에서 있었던 시위에서 14살의 일본인 여중생이 ‘쓰루하시 대학살을 실시한다’고 외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꼬집었다. 그는 “일본은 2년 전 동일본대지진 직후 전 세계로부터 따뜻한 동정을 받았지만 그 이미지가 급속히 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생활이 16년째라는 미국 언론인 마이클 벤 기자는 “10년 전의 일본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우려했다.

 외국 특파원들의 우려에 일본인 참석자들도 대부분 수긍했다. 신우익단체 ‘잇스이카이(一水<4F1A>)’의 스즈키 구니오 고문은 “보통 때 못하던 말을 하면서 마치 자신이 거대한 국가라도 된 양 환상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아리타 요시후 의원은 “전후 68년 동안 가장 이상한 데모”라고 우려했다.

 문제는 모든 게 우려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스미마셍(미안합니다)’이란 말이 넘쳐나는 일본 사회지만 주변국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서도 우려만 넘칠 뿐 이를 막거나 줄이기 위한 수단 마련에는 정치권도 언론도 등을 돌린다. ‘재일 한국인 청년연합’이 최근 일본의 12개 정당에 헤이트 스피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묻자 가부간에 답을 준 정당은 4개에 그쳤다. 집권 자민당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쯤 되면 일본 사회가 최근의 상황을 절반가량은 즐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도 자업자득이 아닐까.

김현기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