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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코트 황제 나달 "청각장애 덕희에게 도전정신 배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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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5세 유망주 이덕희(왼쪽·세계 930위)와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세계랭킹 5위)이 중앙일보를 통해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청각장애인 이덕희는 “지금은 팬으로서 나달을 만났지만 앞으로는 선수 대 선수로 그와 맞붙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대한테니스협회]

테니스 유망주 이덕희(15·제천동중)는 청각장애인이다. 지하철이 옆에서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청각장애는 운동선수에게 치명적인 핸디캡이 될 수 있다. 상대가 공을 받아치거나, 공이 바운드될 때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기 중 심판의 콜을 듣지 못해서 답답한 적도 많다. 이덕희의 어머니 박미자(39)씨는 “상대는 멈춰 섰는데, 덕희 혼자 열심히 공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속이 상했다”고 말했다.

 이덕희는 세 살 때 청각장애 판정을 받았다. 온 가족이 시름에 빠졌지만 이덕희는 그렇지 않았다. 어눌한 말투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려 노력했다. 어머니는 활달한 아들에게 테니스 라켓을 선물했다. 이덕희에게 테니스는 운명이었다. 소설책은 10분도 집중하지 못했지만 테니스를 할 때만은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공 튀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대신 눈에 불을 켜고 상대 선수 움직임을 쫓았다. 눈치도 빨라 상대의 공격 방향을 예상하고 기민하게 대처했다. 주위 소음이 들리지 않아 온전히 경기에 몰두할 수 있는 건 장점이었다.

 하지만 장애인이 엘리트 스포츠 세계에서 살아남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박씨는 “편견도 무섭고, 비용도 많이 들어서 덕희가 열한 살 때 테니스를 그만두자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덕희는 울며불며 호소했다. “엄마, 난 테니스 칠 때가 제일 좋아. 코트에 있을 때 내가 제일 빛나는 거 같아.”

 지난 4월 일본에서 열린 쓰쿠바대 국제 퓨처스 대회에서 이덕희는 자신보다 열여덟 살이나 많은 미야자키 마사토시(일본)를 꺾었다. 그가 남자프로테니스(ATP) 랭킹 포인트 1점을 따는 순간이었다. 이덕희는 ATP 출전 선수 중 최연소다. 소리가 없는 침묵의 세상에 테니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감격을 이덕희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덕희의 등장을 눈여겨 본 또 한 사람이 있다. 세계랭킹 5위의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27·스페인)이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영어와 스페인어로 이덕희의 기록을 알리며 ‘그는 항상 도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나달의 팬 460만여 명이 이 글을 읽었다.

2006년 방한 경기를 벌였던 로저 페더러(왼쪽)와 라파엘 나달(오른쪽)이 당시 여덟 살이었던 이덕희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앙포토]

 이덕희는 나달의 관심이 고맙고도 신기했다. 그와는 인연도 있다. 2006년 나달이 로저 페더러(32·스위스·세계랭킹 3위)와 방한 경기를 했을 때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달 같은 선수가 되고 싶었던 이덕희는 쑥쑥 자라 이젠 같은 투어에서 뛰는 선수가 됐다.

 중앙일보는 이덕희와 나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이덕희의 질문을 모아 나달에게 e메일을 보냈다. 그는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경기 중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클레이 코트에서 잘하는 이유는 뭔지, 여성 팬은 얼마나 많은지…. 전 세계에서 수백 건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지만 나달은 흔쾌히 답변을 보내왔다.

 - 전 올해 프랑스오픈 주니어 대회에 참가했는데 1회전에서 탈락했습니다. 전 아직 클레이 코트에 익숙하지 않답니다. 클레이 코트에서 어떻게 그렇게 잘 하나요.

 “음…. 스페인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클레이 코트에서 자주 경기를 합니다. 아무래도 클레이 코트에 익숙해질 기회가 많았죠. 서브나 위닝 샷 같은 경우 다른 코트에서 훈련하면 효과가 없어요. 클레이 코트에서는 클레이 코트만의 전략이 필요해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하드 코트보다 더 집중을 해야 하는데 난 잘 되는 편이죠.”

 나달은 ‘클레이 코트의 제왕’이라고 불린다. 클레이 코트인 프랑스오픈에서 4회 연속, 통산 8회 우승(2005~2008년·2010~2013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 나달 선수는 이번에 무릎 부상으로 긴 공백기를 가졌는데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나요.

 “힘들었지만 다시 테니스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죠. 선수 생활 동안 두 번의 큰 부상이 있었지만 모두 극복했어요. 테니스 선수는 언제든지 부상당할 수 있어요. 그 사실에 익숙해져야 해요. 그래서 난 부상을 무서워하기보다는 다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렇게 해서 힘든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나달은 2007년부터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렸다. 결국 지난해 7월 이후 재활에 돌입했다. 한두 달 쉬고 나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공백이 길어지자 조기 은퇴설까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달은 지난 2월 복귀했고 이후 7개의 타이틀을 휩쓸었다. 나달은 아직도 무릎이 좋지 않아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다.

 - 웨이트 트레이닝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많이 하나요.

 “웨이트 트레이닝은 비시즌에만 합니다. 시즌 중에는 많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어로빅 같은 스트레칭 위주의 운동을 많이 합니다.”

 - 나달 선수 경기를 꼭 봅니다. 그런데 경기 중에는 잘 안 웃더라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또 경기할 때 물병을 가지런히 놓던데 집중하기 위해서인가요.

 “난 어떻게 다음 포인트를 얻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고 경기에 임해요. 웃지 않는 건 집중하기 때문이에요. 절대 일부러 웃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웃음). 물병은 일종의 ‘루틴(반복되는 습관)’입니다. 어릴 때부터 물병을 가지런히 놓았는데 지금은 습관이 됐어요. 내 생각에는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물병을 잘 놓지 않으면 신경이 쓰이기는 하죠. 이것도 일종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루틴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 로저 페더러, 노박 조코비치(26·세르비아·세계랭킹 1위)와 라이벌이잖아요. 막강한 라이벌이 있어서 괴롭거나 힘들지는 않나요.

 “괴롭지 않아요(웃음). 페더러나 조코비치가 있는 건 나에게 특별한 기회라고 생각해요. 훌륭한 선수들과 경쟁을 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거죠. 그렇게 대단한 두 선수와 경기를 하고, 내가 이겨서 우승을 한다면 더 의미가 크니까요. 내가 페더러나 조코비치보다 앞서 있다면, 바로 정상에 섰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두 선수와의 대결로 저는 더욱 성장할 겁니다.”

 - 저는 귀가 들리지 않아서 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친구들과 소통하기를 좋아합니다. 컴퓨터 오락도 자주 합니다. 평소에는 주로 뭘 하시나요.

 “이덕희 선수도 알다시피 시즌 중에는 개인 시간이 별로 없어요. 테니스에만 전념하죠. 집에 있을 때는 가족·친구들과 골프를 치러 갑니다. 요트 타는 것도 좋아하고요. 영화도 많이 봅니다.”

 - 테니스 외에 축구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축구를 잘 하나요.

 “오, 나는 축구를 엄청 좋아합니다. 하지만 부상을 당하면 안 되기 때문에 실제로 축구를 하지는 않아요. TV 중계만 시청합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스페인 출신답게 나달은 열렬한 축구팬이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스페인이 우승하자 감격의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됐다. 나달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를 지낸 삼촌 미겔 앙헬 나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10년에는 삼촌이 스페인 프로축구 클럽 RCD 마요르카의 코치를 맡자 그 구단의 지분 일부를 사들이기도 했다.

 - 나달 선수의 거칠고 남성적인 이미지가 멋있습니다. 머리띠, 민소매 유니폼 등 테니스 패션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여성 팬이 많은 건가요. 참고로 저는 누나 팬이 많아요(웃음).

 “누나 팬이 많다니 재밌네요. 흠, 그런데 난 민소매 유니폼을 안 입은 지 꽤 됐어요. 그럼 팬들이 줄었겠네요? 하하하. 농담이에요. 그저 많은 팬이 응원해 주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

 - 7년 전 방한해 페더러 선수와 경기했을 때, 저는 당신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때 저를 기억하나요.

 “네. 물론 기억합니다. 2006년 한국에서 만난 모든 분들이 환대해서 고마웠어요.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그때부터 한국과 인연이 깊어졌어요. 한국 기업인 기아자동차의 글로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죠. 내가 기아차가 추구하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이미지와 잘 맞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요(웃음). 기아차 광고를 한국어로 찍었는데 정말 어려웠어요.”

 나달은 2007년에 기아차 광고를 찍었다. 스페인어와 영어는 물론 한국어로도 더듬더듬 대사를 읊어대는 모습이 인상적인 광고다. 유튜브에 올라온 광고 영상을 보면 나달이 “가장 큰 장애물은 힘든 경쟁 상대나 매일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기아차 광고를 10개 언어로 찍는 것이다”라는 농담을 한국어로 하는 장면도 나온다.

 - 저는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꿈을 자주 꿉니다. 나달 선수도 그랬나요.

 “나도 항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가 되길 꿈꿨어요. 그러나 실제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돼서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거머쥘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지금 나는 꿈을 이뤘어요. 이덕희 선수도 꼭 이룰 수 있을 거예요. 응원하겠습니다.”

 이덕희는 이형택(37)의 뒤를 이어 한국 테니스를 이끌 선수다. 몇 달 새 랭킹 포인트는 12점이 됐고 ATP 랭킹 930위를 달리고 있다. 나달의 e메일 답장을 받은 이덕희는 ‘성실한 답변에 감동했다. 앞으로는 스타와 팬이 아니라 선수 대 선수로서 나달과 맞붙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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