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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읽은 점자책 덕에 꿈 이뤘다'는 말 듣고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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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육근해 대표가 롤러 앞에서 점자책을 인쇄하고 있다. “일일이 책을 만들어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의 왼손 검지엔 며칠 전 책을 만들다 기계에 찍힌 상처가 나 있었다.

‘쿵쾅쿵쾅, 드르르륵’

 롤러와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분명히 출판사 대표라 그랬는데, 여긴 인쇄공장인 듯. 시장통 허름한 상가 3층에 출판사라니…’ 이런 생각을 하며 사회적 기업인 서울 명일동 ‘도서출판점자(www.kbraille.net)’의 문을 열었다. 파란 앞치마를 두른 채 롤러 앞에서 점자를 인쇄하던 육근해(52) 대표가 반갑게 맞았다.

 “시각장애인들은, 특히 선천적으로 시각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 책을 간절히 원해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거든요. 그 아이들이 ‘안마사가 아니라 과학자·변호사·정치인이 될 거야’란 꿈을 갖게 해주고 싶어요. ‘내가 그때 읽은 점자책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성공한 아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꿈이고 소명입니다.”

 육 대표는 우리나라 시각장애 어린이들에겐 제2의 어머니 같은 존재다. 국내 점자책 공급량의 약 70% 이상을 공급하고 있고, 촉각도서와 점자 라벨을 붙인 책도 처음 개발해 만들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유일한 도서관인 한국점자도서관도 운영한다. 도서관은 그의 아버지 육병일씨(1997년 작고)가 69년 사재를 털어 만든 곳이다.

 - 대를 이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선 10세 때 시력을 잃었다.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사재를 털어 종로 5가에 4평(12㎡) 규모로 한국 최초의 점자도서관을 여셨다. 서울 신촌의 유복한 집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이 일을 하시며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난 이 일을 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직장을 다녔다. 그런데 결국 나도 이 일을 하는 걸 보니 운명인 것 같다.”(웃음)

 가산이 바닥나면서 육 대표는 대학을 제때 나오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며 단국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꿈꿨다. 하지만 92년 아버지가 강권하다시피 도서관일을 맡겼다. 이후 21년째 도서관과 출판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 일에 도움이 될까 싶어 사회복지학과 문헌정보학 석·박사 학위도 땄단다.

 - 운명이라더니 열성이 대단하 다.

 “반강제로 시작한 일이지만 하다보니 목적의식·소명의식 같은 게 생겼다. 아버지가 왜 나에게 이 일을 맡겼는지도 마음으로 알게 됐다. 시각장애아동의 부모님들이 ‘우리 애가 이 책을 읽어서 너무 잘 자라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씀하실 땐 정말 고맙다. 맹학교 선생님들도 ‘꼭 계속 만들어주셔야 된다’고 부탁하신다. 지금은 온라인 대형서점 등을 통해 책이 판매되는데, 12년 전엔 운영난으로 폐업위기까지 갔다. 점자도서관은 이제 6만 권이 넘는 장애인용 도서를 소장하고 있고, 출판사 운영도 그럭저럭 궤도에 올랐다.”

 - 꿈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인데.

 “장애를 가진 이들도 차별없이 문화 복지를 누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선천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잠재력은 우리의 선입견 그 이상이다. 이 아이들은 책이 없어서 못 읽는다. 요즘 청소년들의 문제인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없고 TV도 볼 수 없다. 책을 정말 좋아하고 상상력도 풍부하다. 집중력도 뛰어나다. 그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면 우리나라의 큰 재산이 될 거라 확신한다. 국가가 보살펴야 할 애들이 줄어든다는 측면도 있다. 스스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책을 통해 키우고 싶다. 그게 내 제일 큰 꿈이다.”

 - 촉각도서와 점자 라벨도서를 개발했다던데 낯설다.

 “촉각도서는 사물의 형태나 색에 대한 인지가 되지 않은 선천적 장애 아동들을 위해 만들었다. 예컨대 전래동화 ‘햇님달님’에 썩은 동아줄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거기다 실제 새끼줄을 붙여 만져보며 느낄 수 있게 한 게 촉각도서다. 촉각도서 ‘터치미(Touch Me)’는 지난해 일본 수출에 성공했고, 프랑스·스페인 수출도 논의 중이다. 라벨도서는 일반 도서 위에 투명 코팅지로 점자 라벨을 만들어 붙인 거다. 시력 문제가 없는 친구, 가족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책을 읽고 대화하며 서로 장벽을 없애는 데 꼭 필요한 책이다.”

 육 대표는 도서출판점자 외에도 ‘BF(배리어프리·Barrier Free)북스’도 함께 운영 중이다. 다문화 가정을 위한 이중언어 도서와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수화가 함께 표시된 책을 만드는 곳이다. “연간 출판되는 책 5만 종 중 점자책이나 음성 녹음된 책의 비중은 2% 내외다. 그나마 아동도서는 0.01%밖에 되지 않고. 더 다양한 책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꿈을 갖게 해주고 싶다. 제 생명과 제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을 거다.”

글·사진=한영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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