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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영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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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시리즈」는 최근20여년동안 세계각국 문단에 형성된 새로운 문학풍토를 개관하고 그속에서 대표적 인간상을 추출함으로써 문학작품속에 부각된 현대적상황과 그안에서 호흡하는 인간의 문제를 밝히기 위해 기획된것이다.
영국의 전후이야기는 1944년쯤부터 시작하는것이 옮다. 영국 사상 가장 현대적이고 본격적인 보통교육법이 제정된 해가 44년이었다.

<지배계급위세추락 핵탄·냉전이새위협>
전쟁도 한고비를넘어서 이제는 모두 전후를 위해서 설계를 할 때가왔다고 생각했고 독일과의 전쟁에서의 승리가 바로 눈앞에 다다랐을 때 영국의 유권자들은 나라의 영웅인 「처칠」을 권좌에서 끌어 내리고 노동당에 전후 영국의 살림을 맡겼다. 전쟁중에 겪었던 통제와 배급제와 극도의 내핍생활은 전후 5년동안 노동당 집권 아래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영국의 전통적인 정치체계-「보디·플리틱」이라는것-은 근본적으로 변모하고 전통적인 지배계급의 위세는 대영제국의 사실상의 해체와함께 땅에 떨어지고 하류배급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향상되었다.
한편 45년부터 50년까지 전쟁중에는 미처 심각하게 생각해볼 겨를이없었던 새로운 위협이 급속도로 구체화했다. 공산주의의 위협. 공산진영과 영국을 위시한 자유진영과의 냉전이 그것이었다. 냉전은 한국전쟁이란 모양으로 열전화했다. 영국은 물론, 한국전에 참전해서 공산군과 싸워 「글로스터」연대를 잃기도했다. 그런가하면, 원자탄의 위협이 있었고, 날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정신생활면에 던져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사회주의 탈간증오 용기와정의에 집착>
전쟁전후를 통해서 가장 영국적인 인간상의 보기를 나는 『1984연』의 저자「조지·오웰」에서본다. 「오웰」은 스스로는 식민지 관료의 가문에 태어나서 「이튼」을 다닌 사람이었지만, 영국의 노동계급에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비교적 짧은 생애을 살았고, 또 그애착을 통해서 영국에대한 깊은사랑을 느꼈다.
「오웰」은, 한편으로 전통적인 지배개급이 과시하던 모든 부조리를 증오하고, 또 이논적인 사회주의자들의 농간을 미워했다. 「오웰」은 영국의 평민들을 사랑하고. 언제나 그들편에서서 사물과 세계를 관찰했다. 「오웰」에게는 그나름의 편견이 있었고, 고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견이나 고집을 정당화하고도 남음이 있을, 용기와 정직에대한 집착이 있었다.
「오웰」이 갈구한 것은 인간사회, 특히 영국 사회가 되찾아야할 「디슨시」(품위)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후 그의 만년에 영국이 「디슨시」를 되찾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두드러진 위협을, 「오웰」은 공산주의와같은 「전체주의」의 가능성에서 보았다. 악랄한 전체주의의 표본과도 같은 「나찌스」를 패배시키자마자 다시 전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또 부조이의 극치였다. 그러나, 패결핵을 앓으면서, 죽기 직전에 탈고한『1984년』이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그내용으로 한것을 보면, 「오웰」은, 영국에 그와같은 괴물이 출현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1984년』의 「스토리」는 이제 세계의 독서인들의 상식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가없다. 「1984년』의 「캐치프래이즈」는 『큰형님이 너를 감시하고 계신다』라는 것이다. 국민 전체가 그 큰 형님의 자비로운 감시하에 노예생활을 강요당하고, 큰 형님과 그의 소수 참모들은 정치적인 야욕을 마음대로 충족시키기 위하여. 역사를 변조하고 구약이래의 갖은 악을, 일사불란하게 자행한다.

<무너지는 전통사회 새로운실속꾼 등장>
아무리 고매한 경륜이라도. 또 아무리 고귀한 이상이라도, 소수의 악인들의 손에 걸려 들면, 하루 아침에 인류에게 지옥살이를 안겨다 줄 수 있다는 것이 「오웰」의 「메시지」였다. 「오웰」의 『1984년』이나 또는 「헉슬리」의 『다시 찾은 화사한 신세계』와 같은 것이 문학작품이냐, 또는 「프로퍼갠더」(정치선전)냐 하는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웰」이 진실한 의미에서 소설가였느나, 또는 「저널리스트」였느냐 하는것도 상관할것 없다.
전후 영국의 문인들의 글을 통해서 우리가 엿볼수있는 영국의 대표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는 한 보기로서 「오웰」의 『1984연』이 좋은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오웰」이 주야로 걱정한 영국의 하류계급에게는, 전체주의의 위협이 그렇게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제는 크게 향상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무너져가는 전통사회의 와중에서 어떻게 실속을 차리느냐 하는것이 더절실했다. 이제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수없다든가, 병이 나도 약 살돈이 없어서 죽어간다는 일은 없게 되었다. 재주만 있으면 왕년에 귀족들의 아성이었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도 갈수있고, 지방대학은 「코크니」라는 「런던」토박이 사투리를 위시한 모든 지방사투리의 전시장 꼴이 되어갔다. 「비틀즈」의 유행을 앞지른 「테리·보이즈」라는 물건이 거리를 무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두드러진 문화를 지니지 뭇한- 또는 아직 형성하지 못한- 하류계급이 노릴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실속은 이제는 사라져가는 전통적인 지배계급의, 이를테면 사미쯤에 끼어 드는 일이었다. 노동당이 집권해서 큰 변혁이 일어났지만, 여왕과 세습귀족들과 영국은행총재와 「옥스퍼드」의 「올·솔즈·칼리지」따위가 대표하는 소위 「이스태블리슈먼트」(기존사회체제)가 일조일석에 그자취를 감출리가 없었다.

<문단의 전통에이변 하류사회를 소재로>
전후 영국이 배출한 전형적인 실속꾼을 우리는 「존·브레인」의 『룸·애트·더·톱』에서본다. 『높은 데에 낄 자리가 있다』정도로 번역됨직 하다.
『산장의 밤』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전후 영국 작가중에서 일종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람들에 공통된 폐단은. 그 처녀작이 재미있고, 두번째 작품부터는 김빠진 졸작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브레인」은 이 작품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을 근년에 냈지만 그성과는 처녀작에 비할바 못되는 것이었다. 그야 어떻든 한때 영국의 비평가들이 영국문단의 전통을 깨고 하류계급을 소재로 성공했다고 해서 크게 떠들어댄 이 작품의 주인공 「조·램프튼」은 무서운 출세주의자였다. 전쟁때는 공군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포로가 돼서 수용소에 있는 동안 남들은 탈출, 계획을 짜는 동안에 회계사시험준비를 했다. 종전후 돌아와서는 돈과 세력과 보수주의의 보급자리에 파고 들기 위하여 부잣집 딸「스잔」과 결혼하는데까지 출세의 사닥다리를 기어 오른다. 그동안에 비록 관능적으로나마 즐기고 사랑하던 연상의 정부 「앨리스」가 그의 출세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등장했을때, 그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앨리스」는 마침내 자살이나 다름없는 끝장을 본다.
그렇게해서 얻은 높은 자리가 과연 야심한 「램프튼」에게 무슨 재복을 가져다주었는가를 암시하는 것이 「브레인」의 근작 『높은 자리에서의 생활』이었다. 그것은 한없이 지루하고, 실상 무의미한 것이었다. 소설로서도 지루하고도 무의미했다. 영국에서 「램프튼」유의 출세극의 「데누망」(대단원)은 그리 지루하기만한 것이다.

<풍자거리 고등교육 갖은희비극을 연출>
평론가 「앨턴」의 말과 갈이, 이제돌이켜 생각해보면, 53년과 54년 두해가 전후의 영국문학, 특히 영국소설에서 큰뜻을 갗는것같이 보인다. 그두해 사이에, 「아이리스·머도크」의『그늘 아래서』가 나왔고, 「윌리엄·골링」의 『파리왕』이 나왔으며 또「킹줄리·에이미스」의 『러키·짐』이 나왔다. 이 세작품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에이미스」의 『러키·짐』의 주인공「짐·딕슨」이 재미있다. 「짐」은 지방대학의, 이를테면 시간강사이고, 원래가 「램프튼」과 크게 다를것이 없는 출신의 청년이다.
그런데 「램프튼」과 다른 것은 「짐」에게는 이렇다 할 출세욕이 없다. 「램프튼」보다는 한결 순결한 청년이다. 실상 순결이 지나쳐서 모든가식을 증오하는 두드러진 결벽성이 있다. 이 결벽성이 전통사회의 화신과 같은 주임교수의 가식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갖은희비극을 다 연출한다. 주임교수와 충돌하는 것에 그치지않고 그의아들과 다투고 끝내는 그아들의 여자 친구를 채가지고 「런던」으로 줄행랑을 놓는다. 우리는 이작품을 여러가지로 읽을 수 있다.
그냥재미있는 「벌레스크」로 읽을수도있고 영국의 지방대학이 대표하는 고등교육에 대한 풍자로도 읽을 수 있다. 혹은 「존·오즈본」의, 소란스러운 연극이 보여주고, 「저널리즘」이 「앵그리·영·맨」이라는 딱지를 붙인 노한 젊은이의 한 전형을 「짐」에서 찾아도 좋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문학작품이 보여주는 한인간상의 보기로서 「짐」을 분석할때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것은 다시 「앨런」교수가 지적했듯이-「짐」의 도덕적인 진지성이다. 특히 남녀관계에 있어서의 진지성이 그것이다. 「빅토리아」시대나 「에드워드」조의 「모럴」이 아니라 전후 거의 모든 전통적인 가치가 다 부조리한 것으로만 비치게 되었을 때 「램프튼」의 경우와는 달리 「짐」은 가식대신에 정직을 택하고,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사랑과 상부상조의 고전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모든 권위와 지배계급의 모든 기득권과함께 전통사회가 보여주는 모든 가식을 증오하고 그에 항거하는것을 업으로 삼는듯이 보이는 「오즈본」의 『노해서 돌아보다』의 주인공에 비하면 지금은 소심하고 겁이 많은 전형적인 소시민의 한사람 같이 보일수 있다.
그러나 「오즈본」의 주인공에게는 그대로의 허식이있고 비인정이있고 공허가 있었다.「짐」에게는 이런것이 없다.「짐」은 제나름으로 정직하고 인정있고 일종의 희망이있다. 「짐」의 행각이 영국 사회에 대한 한풍자라면 그것은 「희망있는 풍자」이다. 전후의 영문학이 「오웰」이나 「브레인」이나 또는 「에이미스」가 그린 인물들, 혹은 인물들의 집단뿐인것은 아니다. 두드러진 특색있는 작가를 생각나는대로 들어보면 『알렉잔드리아』4부작을 낸「다렐」과 『파리왕』의 「골딩」을 꼽을수있다. 여기서 「다렐」이나 「골딩」에 길게 언급하지않는 이유는 그들의 작품이나 작품의 내용 또는 소재가 너무나 동떨어진것이어서 전후 영국의 인간상을 그속에서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으로서는 「다렐」이나 「골딩」쪽이 이제까지 든 작품보다 더흥미있다.
그런의미에서 생각나는 작가가 또하나있다. 『종』이라는 훌륭한 작품으로 시작하여 5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까지 독자의 주의를 끌어온 「아이리스·머도크」가 그렇다. 「머도크」가 그리는 인간상이라는것이 반드시 뚜렷하지가 않고 작품마다 경향과 취미와 소양을 달리하는 인물들이 나와서 종잡을수가 없다.

<20년대의 생태 재연 교육받은 한량그려>
『잘라진 머리』에서 작가가 무엇을 노렸느냐 하는 문제를 잠시 덮어 두고, 그속에 그려진 인물들의 생태를 살펴보면 우리는 전후가 아니라 「헉슬리」나 「이불린·우오」가 그린 20년대, 이를테면「블룸즈베리」군상의 재연을 본다. 「머도크」가 그리는 인물들은 대체로 중류상류계급의 교육받은 한량들이다. 「브레인」이나 「에이미스」나 「오웰」의 인물들이 혹은 증오하고, 혹은 경원하고, 또 혹은 은밀한 선망의 눈초리로 돌아보는 종류의 인물들이며 생태이다. 『잘라진 머리』의 인물들에게서 「짐」과 같은 도덕적인 전지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성도덕은 「헉슬리」의 『포인트·카운터·포인트』(연애대위법)에서처럼 완전한 난맥을 이루고있고, 도시 이렇다할 의미가 없는것이 되어있다. 여기에는 안락과 교양의 과잉이있다. 간음이 있고, 근친간이있고, 자살소동이 있고, 「오너·클라인」이 벌이는 일본도장마저있다. 『잘라진 머리』를 두고 우리가생각할수있는것은 전후 영국의 인간상이 반드시 「램프튼」이나 「짐」또는 「오즈본」유의 「앵그리·영·맨」이나 또 혹은 「콜린·윌슨」식의 소위「아웃사이더」와 같은 것으로 요약되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에는 여전히 192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그리고 영국의 정치추세와는 관계없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문화생활의 중심을 이룰 지식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진 머리』에 나오는 인물들과 같은 배경과 교양을 가졌으면서도 20년대이래의 공허와 무의미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긍정적이고 진지한 생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 영국의 문학작품에 등장할때 우리는 다시 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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